부처의 길 따라가기
[스크랩] 밝음 속에 드러내는 일.../ 틱낫한
가시코이
2009. 3. 26. 18:57
♣밝음 속에 드러내는 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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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쥬스를 컵에 따라 가만히 놓아두면 매우 맑아지게 된다.
쥬스 컵은 매우 안정된 토대를 갖고 있다.
쥬스 컵은 매우 안정된 토대를 갖고 있다.
하지만 그대의 앉아 있음은 그 정도로 확고하지가 않다.
과즙의 작은 알갱이들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서서히 컵 밑바닥으로 가라앉을 수밖에 없다
.
하지만 그대의 마음 속 생각들은 그런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로 벌떼처럼 들떠서 매 순간 분주히 날아다닌다.
하지만 그대의 마음 속 생각들은 그런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로 벌떼처럼 들떠서 매 순간 분주히 날아다닌다.

그대는 생각하고 느끼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한 컵의 쥬스와 비교할 수는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더 나아가 우리가
사과 쥬스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것들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앉아 있는 동안만이 아니라,
걸어다니고 일을 하는 동안에도 그 평화로움을 지속할 수가 있다.

어린 아이는 가볍게 숨을 쉬고 평화롭게 잠든다.
아이들은 그건 식으로 아무 노력 없이 잠이 든다.
아이들은 그건 식으로 아무 노력 없이 잠이 든다.
도무지 잠이 안 오는 밤, 잠을 자려고 노력할수록
더 잠이 안 온다는 사실을 그대는 알 것이다.
그대는 평화로워지려고 억지로 노력한다.
그때 내면으로부터 저항감을 느낀다.
처음 명상을 할 때 많은 사람들이 그런 종류의 저항감을 경험한다.
고요해지려고 더 많이 노력할수록 그들은 더 많이 불안해진다.
그런 저항감은 평화로워지려고 하는 우리의 노력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노력 그 자체가 하나의 억압이다.

우리의 느낌과 생각들은 강물처럼 흐른다.
만일 강물의 흐름을 막으려고 노력한다면, 물의 저항에 부딪칠 것이다.
만일 강물의 흐름을 막으려고 노력한다면, 물의 저항에 부딪칠 것이다.
물과 함께 흘러가는 것이 더 좋다.
그래야 원하는 방향으로 강물을 흐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흐름을 멈추게 하려고 해선 안 된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강물은 흘러가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흐름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그리하여 그 강으로 흘러드는 모든 실개천들을 자각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 느낌, 감각들에 깨어 있어야 한다.
그것들이 태어나고 지속되고 사라지는 것에 대해 깨어 있어야 한다.

그것을 이해하겠는가?
그때 그 저항감은 사라지기 시작한다.
거기 강은 여전히 흐르고 있지만, 더 이상 어둠 속에 있지 않다.
그것은 이제 깨어 있음이라는 햇빛 속을 흘러가고 있다.
그 깨어 있음의 태양이 우리 안에서 언제나 빛나게 하는 것,
그리하여 모든 개울물과 모든 조약돌, 강의 모든 굽이들을
환히 비추게 하는 것이 곧 명상이다.

명상을 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 세세한 것들을 지켜보고 깨어 있는 것이다.
물론 강은 여전히 거기 있고 여전히 흘러가고 있다.
하지만 깨어 있는 순간, 우리는 우리가 주인임을 느낀다.
물론 강은 여전히 거기 있고 여전히 흘러가고 있다.
하지만 깨어 있는 순간, 우리는 우리가 주인임을 느낀다.
그 순간 우리는 평화로운 자기 자신을 느낀다.
하지만 그것은 사과 쥬스의 '평화'는 아니다.
평화롭다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느낌이 얼어붙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비된 상태와는 다른 것이다.
평화로운 마음은 생각과 감각, 감정이 텅 비어 버린 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평화로운 마음은 공허한 마음이 아니다.

우리의 존재가 생각과 느낌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은 확실하다.
분노, 미움, 부끄러움, 자만, 의심, 초조함, 혐오감, 욕망,
슬픔, 고민 또한 우리의 마음이다. 희망, 억제, 직관, 본능, 잠재의식,
그리고 무의식적인 마음도 똑같이 자아의 일부분이다.
명상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마음의 참된 본성에 집중하고
명상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마음의 참된 본성에 집중하고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든 생각과 느낌들,
다시 말해 거짓된 마음을 억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생각과 느낌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어떤 대상에 정신을 집중하거나 호흡을 세는 방법을 이용한다.
한 가지 대상에 집중하거나 호흡을 세는 것은 물론 훌륭한 방법이다.
그러나 강제로 생각과 느낌을 억압하기 위해 그것들을 사용해선 안 된다.
억압을 하자마자 거기엔 반발심이 생겨난다.
다시 말해 그 억압 자체가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진정한 마음과 거짓된 마음은 사실 하나다.
어느 한쪽을 거부하는 것은 다른 쪽을 거부하는 것과 같다.
한쪽을 억압하는 것은 동시에 다른 쪽을 억압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곧 우리의 자아다.
우리는 그것을 억압할 수 없다.
그것을 존경심을 갖고 부드럽게,
그리고 절대로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대해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의 '자아'가 무엇인지조차 모른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이 진정한 마음인지 거짓된 마음인지,
또는 무엇을 억압해야 할지 알겠는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우리의 '자아'에 깨어 있음의 햇빛을 비춰
그것을 밝음 속에 드러내는 일이다.
그리하여 그것을 직접 들여다보는 일이다.
- 틱낫한, 마음에는 평화, 얼굴에는 미소 중에서-


출처 : 체칠리아의 또 다른 루니아
글쓴이 : 체칠리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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