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금강반야바라밀경
금강경을 풀이 한다 하면서
금강경을 풀이 한다 하면서
금강경이 나를 풀이 합니다
금강경을 읽는다 하면서
경이 나를 먼저 읽습니다
금강경을 굴려 보려니
금강경이 나를 굴립니다
금강경을 노래 하려니
금강경이 나를 노래 합니다
금강경을 흐르게 하려니
금강경이 나를 흐르게 합니다
금강경을 연독한다 하면서
금강경이 나를 연독합니다
저 기원정사에 사시던
부처님의 금강경과
수보리와 아난의 금강경이
천이백 오십인의 인간이로대 인간이 아닌
성자들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행렬이
숲과 저자거리를 아름다운 향기와
고요와 성스러운 침묵으로 닦아 나갑니다
그들을 스쳐 지나는 바람이 이르는 곳마다
그들을 바라보고 마음 속에 찬탄의 념 이르키는 순간마다
일파가 만파되어 시방 허공 이르지 않는 곳이 없어
시공을 넘나드는 법희와 선열이 온 마음에 가득합니다
저들의 걸음 아닌 걸음 속에
평화로운 수행력과 삶의 고고함이 묻어와
이르는 곳마다 주인공을 지어 가며
가고 머무는 데마다 진리의 향훈이 피어 납니다
금강반야경의 5177자의 글자마다
곱게 갈린 오천일백십구면의 다이아몬드처럼
영롱한 빛이 나고
금강 반야경의 삼십이분의 각 분마다
삼십이면으로 빛나는 금강석의 면면을 나투어
면수가 늘면 늘수로 한마음의 일원상을 지어 가며
더욱 밝게 빛나나니
우주 법계 그대로를
하나의 금강반야의 만다라로 수 놓습니다
아니 각 글자 하나 하나가 각각의 금강석 되어
5177개의 금강석이 마치 하나인양 일합상을 나투다
나뉘면 각각의 5177개의 금강석으로 되 돌아가
하나가 곧 전체요 전체가 곧 하나인
일즉다 다즉일의 화엄으로 피어 납니다
한글자 한글자마다 문자 반야의 빛을 맑히는 법기요
각각의 분마다 관조와 실상 반야의 꽃으로 피어 나니
마치 천개의 꽃 잎을 지닌 연꽃 한송이
우주를 가득 채우고 한잎 한잎 피어 납니다
부처와 부처가 이심 전심하시고
염화 미소 지으심 이것을 의미하고
부처와 조사가 신명을 다받쳐
열반묘심을 전등의 불빛으로 이어 오신 바
오늘에도 역시나 삼천여년 세월을 거슬러
금강 반야 바라밀의 대의가 더욱 빛납니다
우주의 실상과 생명의 진실상이
고스란히 녹아 들어
나도 없고 너도 없어
그저 우리라는 말밖에는
따로이 말이 필요 없는
여여한 펼침과 거둠의 자유자재여
우리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로는
더 이상의 표현과 해설이 불가하기에
언어도단 하고 심행처멸한 자리에서
석가 부처님과 수보리 스님과의 만남이
백천만겁의 무진 인연이 되어
희유하십니다 세존이시여 한마디에
빛나는 한가닥의 깊고 아름다운 가르침
한올 한올 엮어 풀어서 우리 앞에 나투시니
참으로 위대하시고 참으로 감사합니다
참으로 거룩한 성자들의 체취와 향훈이
점점이 아로새긴 축복의 대지 빛의 나라
이 사바 세계 대한민국에
우리 같이 공부하는 작은 인연
같이 모여 이렇게 공부합니다
금강경을 풀이 한다 하였지만
금강경이 나를 풀이 합니다
금강경을 읽는다 하지만
경이 나를 먼저 읽습니다
금강경을 굴려 보려다
금강경이 나를 굴립니다
금강경을 노래 하려니
금강경이 나를 노래 합니다
금강경을 흐르게 하려니
금강경이 나를 흐르게 합니다
금강경을 연독한다 하면서
금강경이 나를 연독 합니다
금강경을 빛내게 하려니
금강경이 나를 빛냅니다
금강경보고
우리를 갈아 달라
우리를 굴려 달라
우리를 흐르게 하라
우리를 읽으시라
우리를 연독하라
우리를 춤추게 하라고
그리하면서 나는,
우리는 없습니다
무드라의 갖가지 동작으로 피어 나는
마음 속의 텅빈 충만이 남을뿐
감사합니다
원효사 심우실에서
해월 대웅 두손 모음
1. 法會因由分 第一
如是我聞 一時 佛 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 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 俱
여시아문 일시 불 재사위국기수급고덕원 여대비구중천이백오십인 구
爾時 世尊 食時 着衣持鉢 入舍衛大城 乞食 於其城中 次第乞已 還至本處
이시 세존 식시 착의지발 입사위대성 걸식 어기성중 차제걸이 환지본처
飯食訖 收衣鉢 洗足已 敷座而坐
반사흘 수의발 세족이 부좌이좌
1. 법회가 이렇게 시작 되었어요
부처님의 제일 오래 모셔서
말씀을 제일 많이 정확히 기억하시는 아난 스님은
부처님의 말씀을 이렇게 들었어요 하고
처음 말을 꺼내셨어요
한때에 부처님이 사위라는 이름의 나라에
기타 왕자와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이가 같이 만든
절에 계시면서 오전 열시경 공양하실 때가 되셨답니다
부처님은 천이백 오십명이나 되시는 제자분들과
사위 국의 큰성에 들어가셔서 차례대로 일곱집을 다녀서
밥을 얻으신 후에 수행하시던 곳에 돌아 오셨어요
부처님과 스님들은 모두 공양을 하시고
옷을 단정히 하시고 밥 그릇을 정리 하신 후에
발을 닦으시고 자리를 고르며 조용히 앉으시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 앉히는 수행에 드셨어요
(어때요 여러분
부처님이 많은 스님들과 같이
조용하고 아름답게 공양하시고
마치 한사람이 움직이는듯 평화스럽고
정결한 모습이 떠 오르시나요?)
2. 善現起請分 第二
時 長老須菩提 在大衆中 卽從座起 偏袒右肩 右膝着地 合掌恭敬 而白佛言
시 장로수보리 재대중중 즉종좌기 편단우견 우슬착지 합장공경 이백불언
希有世尊 如來 善護念諸菩薩 善付囑諸菩薩 世尊 善男子善女人 發阿뇩
희유세존 여래 선호념제보살 선부촉제보살 세존 선남자선여인 발아뇩
多羅三먁三菩提心 應云何住 云何降伏其心 佛言 善哉善哉 須菩提
다라삼먁삼보리심 응운하주 운하항복기심 불언 선재선재 수보리
如汝所說 如來 善護念諸菩薩 善付囑諸菩薩 汝今諦請 當爲汝說 善男子善
여여소설 여래 선호념제보살 선부촉제보살 여금제청 당위여설 선남자선
女人 發阿뇩多羅三먁三菩提心 應如是住 如是降伏其心 唯然世尊 欲聞願樂
여인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응여시주 여시항복기심 유연세존 원요욕문
2.수보리 스님이 부처님께 여쭈었어요
잠시 후에 스님들중에 덕이 높으신 수보리 스님이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 나셔서 옷을 정리 하시고
부처님을 향해 오른 무릎을 꿇으시고 두손을 모은 후에
공경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여쭈었어요
참 드문일이십니다 부처님
부처님은 우리들 진리를 구하고
어려운 중생을 돕고자 하는 수행자들을
잘 보살펴 주시며 법을 잘 일러 주시는 일은.
그런데 부처님이시여
만약에 위 없는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킨 수행자들은
어떻게 세상을 살아 가며
어떻게 마음을 머무는 것이 좋을지 가르쳐 주십시요
하고 말씀 드렸어요
그러자 부처님은 수보리 스님에게
이렇게 말씀 하셨다고 아난 스님은 말 하셨어요
부처님은
수보리 스님에게
착하고 착합니다 수보리 스님이여
수보리가 말한 것처럼
부처는 모든 수행자들을 잘 보살피고
법을 잘 수행하는지 살펴 봅니다.
이제 질문에 대답할것이니 잘 들어 보십시요
그대와 다른 수행자들을 위해 답을 하겠습니다 하셨대요
그러시면서
위없는 깨달음을 얻고자 마음을 일으킨 수행자는
다음과 같이 마음을 머물며
다음과 같이 마음을 다스리면 될것입니다 하셨어요
그러자 수보리와 같이 자리한 대중 스님들은
기쁜 마음으로 들으려고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귀를 기울이셨답니다
(부처님이 평소에 얼마나 제자들을 위하여
마음을 쓰시고 수행을 지도하고 도와 주시는지
수보리 스님과 부처님의 대화 속에 잘 나타납니다
수보리 스님의 스승을 향한 존경과
부처님의 제자 사랑이 이만하시니
참으로 아름다운 사제 관계입니다
어떻게 머무르고
어떻게 살아 가는가 하는 일은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와도
말이 다를 뿐 뜻은 같다고 보입니다)
3. 大乘正宗分 第三
佛告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是降伏其心 所有一切衆生之類 若卵生
불고수보리 제보살마하살 응여시항복기심 소유일체중생지류 약란생
若胎生 若濕生 若化生 若有色 若無色 若有想 若無想 若非有想非無想
약태생 약습생 약화생 약유색 약무색 약유상 약무상 약비유상비무상
我皆令入無餘涅槃 而滅度之 如是滅度無量無數無邊衆生 實無衆生
아개영입무여열반 이멸도지 여시멸도무량무수무변중생 실무중생
得滅度者 何以故 須菩提 若菩薩 有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卽非菩薩
득멸도자 하이고 수보리 약보살 유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즉비보살
3. 뛰어난 수행자의 길
아난 스님은 그때 부처님이
수보리 스님과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 하셨다고
기억하여 말하셨어요
위없는 깨달음을 이루겠다고 마음을 먹은 큰 수행자들은
마땅히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들인
태어나고 살아가는 방식에 따라 사생구류로 분류되는
모든 생명들을 위 없는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 가도록
도와 주는 것으로 마음을 다스리라 하셨대요
(위 없는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공부 하세요 하지 않으시고
부처님은 모든 생명들을
위없는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 가도록
도와 주라 하시니 조금은 의외시지요
그런데 다음의 말씀은 더욱 이상한 말씀이십니다
잘 들어 보세요)
수보리여
이와 같이 무수히 많은 생명들을
위없는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 가게 하였다 하더라도
실제로 도움을 받은 생명은 하나도 없습니다
왜 그런가하면
위없는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이에게
나와 상대, 중생과 수명에 대한 관념이 있으면
진정한 보살 수행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나는
본디 없는 것이라 하시네요
내가 없으니 상대도 없고 그저
하는 일마다 부처님 일이 되고
하는 생각마다 부처님 생각일 뿐이지요
부처님은 그처럼 나가 없는 분이 부처님이예요)
4. 妙行無住分 第四
復次須菩提 菩薩 於法 應無所住 行於布施 所謂不住色布施 不主聲香味觸法布施
부차수보리 보살 어법 응무소주 행어보시 소위부주색보시 부주성향미촉법보시
須菩提 菩薩 應如是布施 不住於相 何以故 若菩薩 不住相布施 其福德 不可思量
수보리 보살 응여시보시 부주어상 하이고 약보살 부주상보시 기복덕 불가사량
須菩提 於意云何 東方虛空 可思量不 不也 世尊
수보리 어의운하 동방허공 가사량부 불야 세존
須菩提 南西北方四維上下虛空 可思量不 不也 世尊 須菩提 菩薩
수보리 남서북방사유상하허공 가사량부 불야 세존 수보리 보살
無住相布施福德 亦復如是 不可思量 須菩提 菩薩 但應如所敎住
무주상보시복덕 역부여시 불가사량 수보리 보살단응여소교주
4. 뛰어난 선행은 모양이 없어요
부처님은 수보리와 제자들이여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진정한 수행자들은
남에게 법으로서나 재물로서나 두려움 없게 하는
도움을 베풀어 주었더라도
베풀고 도와 주었다는 생각이 있거나
마음에 남아 있어서는 아니 됩니다
거기에다 도움을 주는 물질과 정신적인 모든 부분에서
일체의 주고 받았다는 생각이 없어야 하는데
그 까닭은 마음에 머무름이 없어야 진정한 공덕이
이루어 지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이유를 설명하시면서
수보리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하십니다
수보리여 혹시 재주가 있어서
동쪽 허공이나 남서북방의 허공의 크기를
잴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으신 후에
수보리 스님이 부처님의 뜻을 아시고는
생각으로 헤아려 잴수 없습니다 답하시자
부처님은
진정한 수행자들이 모든 생명들을 위하여
나와 상대,중생과 수명이라는 관념이 없이 돕는 공덕이
헤아릴수 없는 허공만큼 크다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시고는 부처님은
진정한 수행자들은 내가 일러준 바대로
마음을 쓰고 머무르도록 하십시요 하십니다
(여러분들도 이제 부처님의 마음을 아셨지요
왜 사느냐
어떻게 사느냐 하는 우리의 고민이
여기서 눈 녹듯 사라집니다
왜 사느냐에 대해
부처님은 모든 생명의 위없는 행복을 위해 살아라
어떻게 살것인가에 대해
부처님은
모든 생명을 위해 살되
너 아니면 나라는 생각을 쏙 빼내고 살아라
그러면 위없는 깨달음을 얻음이 된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5. 如理實見分 第五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身相 見如來不 不也 世尊 不可以身相 得見如來
수보리 어의운하 가이신상 견여래부 불야 세존 불가이신상 득견여래
何以故 如來所說身相 卽非身相 佛告須菩提
하이고 여래소설신상 즉비신상 불고수보리
凡 所 有 相
범소유상
皆 是 虛 妄
개시허망
若 見 諸 相 非 相
약견재상비상
卽 見 如 來
즉견여래
5. 있는 그대로 바로 보는 것
부처님은 이렇게 덧붙이셨어요
수보리여
서른 두가지의 거룩한 몸매가 있어야
부처라 한다고 세간에서 말하는데
그대의 생각에도 그런 특징이 있는 이를 보면
부처를 보았다 할수 있을 것이겠습니까
수보리 스님은
부처님이시여 몸의 특징이
부처를 상징한다는 특징을 갖추었더라도
부처라 할수는 없다고 생각 됩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이 말씀하신 몸의 특징은
몸의 특징이라 할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수보리여 이 세상에 나투어 있는 모든 것은
다만 모양일뿐으로 진정한 것이 아니니
겉에 나타난 모습에 속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진실한 모습을 바로 보면
부처<위 없는 깨달음>을 보았다 할것입니다
(이제 부처님이 말씀 하시고자 하는 뜻을
어느 정도는 확실히 아실 법 하지요
겉 모습에 속지 말라는 말은 요즘에
성형미인이나 얼짱 몸짱 아니면
신기루 같은 환상이나 일확천금을 좆아
속고 울고 사는 신드롬을 해결하는
치료책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아마 몸의 특징으로 부처를 볼수 있다 한다면
성형 수술을 해서라도
부처의 특징을 갖춘 이가 나와
스스로 부처라 하지 않을까요
얼굴은 이쁜데 마음은 마녀와
얼굴은 보통인데 마음은 천사표
둘중에 누가 좋을런지 생각해 보아요)
6. 正信希有分 第六
須菩提 白佛言 世尊 頗有衆生 得聞如是言說章句 生實信不 佛告須菩提
수보리 백불언 세존 파유중생 득문여시언설장구 생실신부 불고수보리
莫作是說 如來滅後 後五百歲 有持戒修福者 於此章句 能生信心 以此爲實
막작시설 여래멸후 후오백세 유지계수복자 어차장구 능생신심 이차위실
當知是人 不於一佛二佛三四五佛 而種善根 已於無量千萬佛所 種諸善根
당지시인 불어일불이불삼사오불 이종선근 이어무량천만불소 종제선근
聞是章句 乃至一念 生淨信者 須菩提 如來 悉知悉見 是諸衆生 得如是無量福德
문시장구 내지일념 생정신자 수보리 여래 실지실견 시제중생 득여시무량복덕
何以故 是諸衆生 無復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無法相 亦無非法相
하이고 시제중생 무부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무법상 역무비법상
何以故 是諸衆生 若心取相 卽爲着我人衆生壽者 若取法相 卽着我人衆生壽者
하이고 시제중생 약심취상 즉위착아인중생수자 약취법상 즉착아인중생수자
何以故 若取非法相 卽着我人衆生壽者 是故 不應取法 不應取非法
하이고 약취비법상 즉착아인중생수자 시고 불응취법 불응취비법
以是義故 如來常說 汝等比丘 知我說法 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
이시의고 여래상설 여등비구 지아설법 여벌유자 법상응사 하황비법
6.바른 믿음을 가지는 일은 드물고 귀한 일이예요
아난 스님이 다시 이렇게 들으셨대요
수보리 스님은 앞에서
부처님이 사구게송으로 말하신
모든 것은 허망한 것이요
겉 모습에 속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로 보는 일이
바로 부처를 보는 일이라 한 말씀을 듣고
이같이 깊은 의미를 담은 가르침에
진실한 믿음을 내는 사람이 있을 것인가 하고
궁금해 하며 여쭈었지요
그러자 부처님은
수보리여 그러하지 않습니다
부처가 돌아 간 뒤
이천 오백년이 지나서라도
계율을 지키고 복을 닦는 이들이 있어서
이 가르침을 듣게 되면 크게 믿음을 내고
진실한 가르침으로 받아 들일 것임을
마땅히 아십시요
이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여러 천만의 수많은 부처님전에
좋은 공부 인연을 심어 둔 사람들이기에
이 글귀를 듣고서는
한 순간에 깨끗한 믿음을 낼것입니다
수보리여
부처는 이같은 모습을
깨달은 눈으로 다 알고 보는데
이런 수행자들은 크나큰 복덕을
성취한 사람들이 될것입니다
왜 그런가하면
이 사람들은 무슨 일을 행하든
나와 상대,중생과 수명이라는 관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선행을 쌓아온 사람들이어서 그러하며
만약 그런 상의 관념에 사로잡힌다면
부처는 이와 같이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응당 법이라 하더라도
집착하는 마음을 내지 말아야 하니
법이 아닌것은 하물며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뗏목의 비유를 들어서
강을 건너면 뗏목을 놓아 두고 길을 가듯
법에 의지하여 깨달음의 저 언덕에 이르르면
법조차도 집착하지 않을 일이기에
법 아닌 것이야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바로 여러분들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에요
부처님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모두 다 허망한 것이요
그 허망함 속에 있는 그대로 바로 보는 것이
부처를 드러냄이라 하는 가르침을 듣고
전혀 의심치 않고 믿고 받아 들임은
참으로 드문 일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이미 어려서 아니면
청소년기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으며
의심 없이 받아 들이고 있으니
이 얼마나 희유한 일인가요
그들은 오래전의 시간부터
수천 수만의 부처님 전에서
선근 인연을 심던 이들이어서
마치 내가 등을 갖고 있으매
부처님의 붙여 주시는 불꽃으로 말미암아
스스로가 밝게 드러 나고
세간을 비추는 이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들은 나와 상대,중생과 수명등의
차별화된 관념을 갖지 아니 하면서
모든 생명들을 영원한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되
마치 목적지에 다다르면
타고 간것에서 미련 없이 내려서
다시 길을 나서듯
부처님이 설하신 진리 조차도
집착하지 않아야 하는데 하물며
진리 아닌 것이야 돌아볼 리가 있을 것입니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세상의 수 많은 가르침들 중에
어느 것을 취하고 버릴 것인가
고민 되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비추어 보면
취하고 버림이 없이
베풀고 나누고 선행하면 된다는 뜻이 됩니다)
7. 無得無說分 第七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耶 如來有所說法耶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야 여래유소설법야
須菩提言 如我解佛所說義 無有定法 名阿뇩多羅三먁三菩提
수보리언 여아해불소설의 무유정법 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
亦無有定法 如來可說 何以故 如來所說法 皆不可取 不可說 非法 非非法
역무유정법 여래가설 하이고 여래소설법 개불가취 불가설 비법 비비법
所以者何 一切賢聖皆以無爲法 而有差別
소이자하 일체현성개이무위법 이유차별
7. 부처의 경지는 얻거나 말해 지는 것이 아님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묻습니다
수보리여
부처가 위 없는 깨달음을 얻었다거나
또 부처가 가르친 바 법이 있다고 할것인가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수보리 스님은
부처님이시여
제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 하기로는
위 없는 깨달음이라 할 일정한 법이 없으며
부처님도 법이라 하여 설하신 법이 없음입니다
왜냐하면 위 없는 깨달음이라 설하신 것은
취하거나 설할수 없으며
법이라거나 법 아니라 함도 아니어서
일체의 현자와 성자들이
무위법(함이 없는 법)에서
차별을 나툰바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부처는 누구인가
깨달음을 얻은 분은 누구인가
깨달음의 내용은 무엇인가
부처가 가르친 법은 무엇인가에 대한
부처님과 수보리의 대화가 아름답습니다
부처님도 수보리도 서로의 속내를 다 아시면서
모든 생명들을 위하여 수고를 아끼지 않으시니
어찌 아름답지 않으시겠습니까
부처도 깨달음도 설법도
이름 지을수 없고 모양 지을수 없는
그 무엇입니다
법은 법이라 이름 짓는 순간 법이 아니며
이름은 이름하여 이름짓는 순간 이름이 아닙니다
공주에 계룡산과 금강이 있으나
계룡산과 금강은 계룡산이 아니고 금강도 아닙니다
그저 여여한 그 자체일 뿐으로
강연히 사람들이 이름 지어 금강이라 하는 것이지요
탕탕무애하여
부처도 수보리도 급고독 장자도 사위국도
이 대지도 티끌도 나툼 없이 나툼이요
스러짐 없이 스러집니다)
8. 依法出生分 第八
須菩提 於意云何 若人 滿三千大千世界七寶 以用布施 是人 所得福德
수보리 어의운하 약인 만삼천대천세계칠보 이용보시 시인 소득복덕
寧爲多不 須菩提言 甚多 世尊 何以故 是福德 卽非福德性 是故 如來說
영위다부 수보리언 심다 세존 하이고 시복덕 즉비복덕성 시고 여래설
福德多 若復有人 於此經中 受持乃至四句偈等 爲他人說 其福 勝彼
복덕다 약부유인 어차경중 수지내지사구게등 위타인설 기복 승피
何以故 須菩提 一切諸佛 及諸佛阿뇩多羅三먁三菩提法 皆從此經出
하이고 수보리 일체제불 급제불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 개종차경출
須菩提 所謂佛法者 卽非佛法
수보리 소위불법자 즉비불법
8. 복덕이 법에 의지하여 나옴을 설하심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물으셨어요
수보리여
어떤 사람이 이 세계를
일곱가지 보배로 가득 채워서 베푼다면
얻는 복덕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수보리 스님은
매우 많을 것입니다 부처님이시여
왜 많다 하는가 하면
그렇게 짓는 복은
다함 없는 복덕의 성품이 아니기에
부처님은 복덕이 많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말하셨어요
그렇습니다 수보리여
만약에 어떤 사람이 있어서
이 금강반야바라밀경에 있는 네구절의 게송들을
누군가를 위해 설해 준다면
그 복은 칠보로 베푼것보다 더 뛰어 납니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일체 모든 부처님의 위없는 깨달음의 법이
다 이 금강반야바라밀경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여
이른바 불법이라고 하는 것은
이름하여 불법이라 하지만 불법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 모두는 복덕을 구하고 원하지만
어느것이 진정한 복덕이 되는지는 잘 모릅니다
일반에서는 물질적인 베품을 통해 얻는 복덕을
많다 적다하는 크기로 나누지만
아무리 큰 복덕도 다함이 잇는 것입니다
하지만 법에 의지하여 나투는 복덕은
다함이 없는 복덕의 샘물과도 같은 것이어서
영원히 사용할수 있으며
그 법은 다만 금강경의 가르침중에
사구게송만을 남을 위해 설해 주는 공덕으로도
성취할수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배고픈 이에게 빵을 주어
허기를 면하게 하는 것과
빵을 굽는 기술을 가르쳐 주어 스스로
허기를 면하게 하는 것과 비슷한 일일 것입니다
그만큼 이 금강반야바라밀경의 가르침은
실로 부처를 나투고 법을 드러 내며
온갖 공덕을 성취하게 하는 법의 경전입니다
부처님은 당신이 설하신 법조차도
집착하는 어리석음 경계 하시고자
법 아닌데서 법을 설하심이라 다시
강조하십니다)
9. 一相無相分 第九
須菩提 於意云何 須陀洹 能作是念 我得須陀洹果不 須菩提言 不也 世尊
수보리 어의운하 수다원 능작시념 아득수다원과부 수보리언 불야 세존
何以故 須陀洹 名爲入流 而無所入 不入色聲香味觸法 是名須陀洹 須菩提
하이고 수다원 명위입류 이무소입 불입색성향미촉법 시명수다원 수보리
於意云何 斯陀含 能作是念 我得斯陀含果不 須菩提言 不也 世尊 何以故
어의운하 사다함 능작시념 아득사다함과부 수보리언 불야 세존 하이고
斯陀含 名一往來 而實無往來 是名斯陀含 須菩提 於意云何 阿那含 能作是念
사다함 명일왕래 이실무왕래 시명사다함 수보리 어의운하 아나함 능작시념
我得阿那含果不 須菩提言 不也 世尊 何以故 阿那含 名爲不來 而實無不來
아득아나함과부 수보리언 불야 세존 하이고 아나함 명위불래 이실무불래
是故 名阿那含 須菩提 於意云何 阿羅漢 能作是念 我得阿羅漢道不 須菩提言
시고 명아나함 수보리 어의운하 아라한 능작시념 아득아라한도부 수보리언
不也 世尊 何以故 實無有法 名阿羅漢 世尊 若阿羅漢 作是念 我得阿羅漢道
불야 세존 하이고 실무유법 명아라한 세존 약아라한 작시념 아득아라한도
卽爲着我人衆生壽者 世尊 佛說我得無諍三昧人中 最爲第一 是第一離欲
즉위착아인중생수자 세존 불설아득무쟁삼매인중 최위제일 시제일이욕
阿羅漢 世尊 我不作是念 我是離欲阿羅漢 世尊 我若作是念我得阿羅漢道
아라한 세존 아부작시념 아시이욕아라한 세존 아약작시념 아득아라한도
世尊 卽不說須菩提 是樂阿蘭那行者 以須菩提 實無所行 而名須菩提 是樂
세존 즉불설수보리 시요아란나행자 이수보리 실무소행 이명수보리 시요
阿蘭那行
아란나행
9. 한 법도 얻을바가 없음을 말하시다
부처님은 다시 수보리 스님과
이렇게 대화하셨답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에 수행자의 첫단계라 하는
수다원에 이른 수행자가
나는 수다원의 공부를 성취 하였다
생각하겠습니까
그러자 수보리 스님은
아닙니다 부처님
수다원은 성스러운 성자의 무리에
들어 갔다고 하는 이들이지만 실은
자신이 들어 갔다는 생각이 없는 이들로
색성향미촉법등의 바깥 대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안으로 돌이켜 보기에
수다원이라 이름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다시 물으셨습니다
그럼 수보리여
수행의 두번째 결과라 하는 사다함들이
자신은 사다함의 공부를 성취하였다 하겠습니까
수보리는
아닙니다 부처님이시여
사다함이란 이 생을 마치면
다시 한번 환생하여 와서 공부를 온전히
성취하는 이들이지만
그들에게는
간다거나 온다 하는 생각이 없는 이들이라서
사다함이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다시
수행의 세번째 단계인 아나함은
스스로 아나함의 공부를 성취하였다
생각하겠는가 하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수보리 스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아나함은 이 세상을 떠나면
다시 환생하여 오지 않는 이지만
실은 오지 않음도 없기에 아나함이라 이르는 것입니다
그럼 수보리여 공부를 마친 성자들인 아라한은
나는 아라한과를 얻었다 생각하겠습니까
하고 물으시자
수보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공부를 성취한 이를 아라한이라 하지만
아라한이라 이름할 법이 없음입니다
만일 아라한이
나는 아라한의 공부를 성취하였다 한다면
그는 나와 상대,중생과 수명이라는
관념에 빠져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러기에 부처님이 저를 칭찬해 말하실때
다툼이 없는 삼매를 얻은 제자 가운데
수보리가 제일이며
욕심을 떠나기로도 수보리가 제일이라 하시지만
저는 그같은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습니다
제가 만일 아라한의 공부를 성취한 자라고 생각한다면
부처님은 저를 가리켜 삶의 평화를 즐기는 성자라고
말하시지 않을 것이지만
제게는 그같은 생각이 조금도 없으므로
수보리는 삶의 평화를 즐기는 자라고 하십니다
(공부의 단계를 네단계로 나누어 살피신 것인데
수다원과를 이룬 분들은
일곱번의 생을 거듭 하고
여덟번째 생에 다시 와서는
깨달음을 성취하는 분들로
성자의 흐름에 든 사람들이랍니다
사다함은 한생만 다시 와서 깨달음을 성취하는 분들이고
아나함과위는 다시 오지 않고 천상에서 깨달음을 얻으며
아라한은 이생에서 이미 공부를 다해 마친 성자들로
지금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천이백 오십분의 스님들이
바로 번뇌의 불길을 불어 끄신 그분들이십니다
공부의 경지는 표 낼수 있는 것도 아니고
표를 낸다면 진정한 공부인이 아니라는 문답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십니다
작은 실력이나 알음알이에도 우쭐하여 교만하기 쉽고
비교 심리를 가지고 상대를 깔보기 좋아 하는 이들은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 못하는 사람입니다
모두가 부처 될 종자를 지니고 있음을 눈여겨 본다면
나와 내 가족 내 이웃들을 부처처럼 섬기는 일이
여기서 시작됩니다
나보다 못난 사람 하나도 없고
나보다 부족한 사람 어디에도 없음을 알면
공부인의 자세 갖춰진 것이라 할것입니다
수보리 같이 다툼이 없고
온갖 욕망을 떠나 온전한 마음의 평화 성취한 이들
그들과 같이 되고자 우리는 끊임 없는 마음으로
부처님이 부촉하신 가르침처럼
모든 생명들로 하여금
위 없는 깨달음의 길로 나아 가도록 도와 드리는
노력과 정진 쉬지 않아야 할것입니다
이 네단계의 수행은 마치
대학교 사년 과정을 연상케 합니다
수다원은 천신만고를 겪고
원하는 대학에 진학한 것입니다
여기에 들어 가면 혹시 게으름을 피워
낙제를 하더라도 다시 일학년이어서
고등학교로 돌아 가지는 않으니
성자의 흐름에 들어 다시는 중생의 차원으로
돌아 가지 않는 수다원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학교에 적응하는 과정이 필요하고
마치 절에 간 색시처럼 무얼 해야 할지 모르는
초심자와 같아 예류과라 하기도 합니다
사다함은 이제 이학년 즈음 되어서
학교 구석 구석 친구 이모 저모 교수 좋고 낮고등
풀방구리 쥐 드나들듯 여기 저기 다녀도 보고
미팅도 수없이 하며 누구 하나 잡아 보려고
눈에 불을 킵니다 ㅎㅎ
아나함은 이제 삼학년이 되는 시간이라
자기 공부에 전념하면서 진로를 결정하는
중요한 시기입니다
하여 여기 저기 기웃 거리거나
이일 저일 만들어 요란하게 사는 것을 멈추고
자신의 내실을 기하느라 별 표가 나지 않습니다
아라한은
실력도 갖추어서 수업도 그저 간간이 나오고
자신의 미래에 대한 설계와 자심이 확실히 서서
어느 경우라도 더 이상 흔들리거나
이곳 저곳 다니면서 더 배울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대학 입학 당시
처음을 생각하면 할바마마 된 모습입니다
대학으로 말해 그렇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아니면 정신적으로
유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로 나누어도 되겠군요
우리 주위에 만나는 가족과 친구들중에
나는 어디에 해당할까요)
10. 莊嚴淨土分 第十
佛告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昔在燃燈佛所 於法 有所得不 不也 世尊
불고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석재연등불소 어법 유소득부 불야 세존
如來在燃燈佛所 於法 實無所得 須菩提 於意云何 菩薩 莊嚴佛土不 不也
여래재연등불소 어법 실무소득 수보리 어의운하 보살 장엄불토부 불야
世尊 何以故 莊嚴佛土者 卽非莊嚴 是名莊嚴 是故 須菩提 諸菩薩摩訶薩
세존 하이고 장엄불토자 즉비장엄 시명장엄 시고 수보리 제보살마하살
應如是生淸淨心
응여시생청정심
不應住色生心
불응주색생심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應無所住 而生其心
응무소주 이생기심
須菩提 譬如有人 身如須彌山王 於意云何 是身 爲大不 須菩提言 甚大
수보리 비여유인 신여수미산왕 어의운하 시신 위대부 수보리언 심대
世尊 何以故 佛說非身 是名大身
세존 하이고 불설비신 시명대신
10. 부처님 세계(정토)를 아름답게 함(장엄)
아난 스님은 다시 이렇게 말하셨어요
부처님이 수보리 스님에게 물으시기를
수보리여
그대 생각에 부처가 예전의 연등 부처님 회상에서
법이든 무엇이든 얻은 것이 있다고 생각 합니까
하셨답니다
그러자 수보리 스님은
아닙니다 부처님이시여
부처님은 연등 부처님 회상에서 얻으신 것이 없습니다
하셨대요
그러자 부처님은 수보리 스님에게 다시 물으셨답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에는 보살 수행자들이
부처의 나라를 장엄한다고 생각합니까 하고요.
수보리 스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
부처님 나라를 장엄한다 하는 것은
장엄할수 없는 것을 이름하여 장엄이라 한 것입니다
그렇게 답을 올리자 부처님은
그러합니다 수보리여
모든 보살 수행자들(마음을 닦는 이)은 마땅히
이와 같은 청정한 마음을 내어야 합니다
물질에 머물거나 소리 향기 맛 부딪힘 법등
색성향미촉법에 집착하여 마음을 내지 말며
그외에 어디에도 머무름이 없어야 합니다
마땅히 그 어디에도 걸림이나 머무름
집착이 없이 마음을 내어야 한다고 거듭 말씀 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비유하여 말씀 하시려
수보리여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만 하다면
이 몸이 큰 몸일것인가 하고 묻습니다
아난 스님은 여기서
수보리 스님이 부처님의 물으시는 의도를
잘 알아서
이렇게 답하셨다고 하십니다
매우 크기는 합니다만
부처님이시여
부처님이 말씀 하시는
몸이 크다는 것은 실제 몸의 크기가 아닌것을
이름하여 큰 몸이라 하신 것입니다
***********
(앞의 단원에서
수행자들의 네단계 공부를 살피며
수다원이나 사담함 심지어는 아라한의 성자들도
내가 무엇을 ...이라는 등의 마음이 있으면
이미 공부의 경지를 얻은 바가 안된다는 내용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렇기에 부처님도 과거 부처님의 회상인
연등 부처님 처소에서 선혜라는 이름의
수행자였던 적이 있었거든요
선혜 수행자는 당시에
연등부처님 전에 칠경화란 꽃을 올리고
진흙탕에 몸을 엎드려 부처님을 지나시게 하여
후에 석가모니라는 이름의 부처가 될것이라
수기를 받으셨답니다
그렇게 수기를 받으셨어도
연등 부처님은 주신 것 없이 주시고
선혜 수행자는 받음 없이 받았으니
주고 받은 사이가 없이 마음을 열리셨습니다
마음이 열리고 보니 저와 내가 둘이 아니요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군요
이렇게 아는 척 해도 잘 못 안것입니다
그러니 훌륭한 수행자라면
자신이 작은 성취라도 공부에 진전이 있다 하여
부처님 회상이나 불문에 무슨 큰 보탬이나
자랑 거리가 되는 줄 알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공부가 익어 지고 성취에 다가갈수록
일체 모든 생명에 하심하고 낮추며 받들고 위하며
바다와 같아 일체 생명의 원천이 되고
대지와 같아 일체를 싣는 도구가 되고
허공과 같아 모든 것을 품어 안고도
남거나 모자람 없이 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수행을 이룬
아름다운 모습이라 할것입니다
아무런 마음의 꼴값을 세우지 않음이
진정한 마음의 꼴값을 만들어 내는 일이기에
무상이 진상입니다
그렇게 꾸민다는 마음 없이 꾸밈이 진정으로
부처의 나라를 꾸밈이 됨을 일러 주시고
수미산의 크기를 예로 다시 한번
우리들 마음에 일기 쉬운 비교의 관념을
치유해 주시니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만약 여러분들 학교나 주위에
골든벨을 울린 학생이 있어서
자기가 학교를 빛 내었다 뻐기고 다닌다면
그 사람은 학교를 빛냄이 아니 됩니다
울리거나 울리기 전이나 한결같아
생활에 별다는 모습이 없으면
진정으로 학교를 빛내는 사람이라 할것입니다)
11. 無爲福勝分 第十一
須菩提 如恒河中所有沙數 如是沙等恒河 於意云何 是諸恒河沙 寧爲多不
수보리 여항하중소유사수 여시사등항하 어의운하 시제항하사 영위다부
須菩提言 甚多 世尊 但諸恒河 尙多無數 何況其沙 須菩提 我今實言 告汝
수보리언 심다 세존 단제항하 상다무수 하황기사 수보리 아금실언 고여
若有善男子善女人 以七寶 滿爾所恒河沙數三千大千世界 以用布施
약유선남자선녀인 이칠보 만이소항하사수삼천대천세계 이용보시
得福 多不 須菩提言 甚多 世尊 佛告須菩提 若善男子善女人 於此經中
득복 다부 수보리언 심다 세존 불고수보리 약선남자선녀인 어차경중
乃至受持四句偈等 爲他人說 而此福德 勝前福德
내지수지사구게등 위타인설 이차복덕 승전복덕
11. 무위복의 수승함을 설하시다
아난 스님은 다시 두분의 대화를
이렇게 들으셨다 합니다
부처님이 수보리 스님에게 물으시기를
수보리여 갠지스 강이 있어서
그 강의 모래 알만큼의 갠지스 강이 다시 있으면
이 모든 갠지스 강의 모래 알을 다 합친다면
많다고 할수 있겠습니까
하셨답니다
그러자 수보리 스님은
부처님이시여 매우 많습니다
갠지스 강도 많다 할것인데
하물며 그 많은 강의 모래를 합한 수이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셨어요
부처님은 다시 말하시기를
그럼 수보리여 다시 한번 묻습니다
어떤 훌륭한 남녀가 있어서
이 모든 갠지스강의 모래를 다 합친 수 만큼의
삼천대펀 세계에 칠보를 가득 채워서
남을 위해 베풀어 주는 경우에 얻는 복이
얼마나 많을 것입니까
수보리 스님은
부처님이시여 대단히 많다 할것입니다
대답하셨고
부처님은 다시 수보리 스님에게
만약 이 금강반야바라밀경에 나오는
네구절의 가르침인 사구게송을
타인을 위해 설해 주어 얻게 되는 복덕은
저 칠보로 삼천대천 세계를 가득 채워
보시한 공덕보다 더 큽니다
하고 말씀 하셨어요
(갠지스 강의 모래 알수만큼의 갠지스강이라 하니
그것도 천문학적인 숫자의 갠지스 강일터인데
그 갠지스강들의 모래 알 수만큼이나 하는
삼천대천 세계면 도대체 얼마나 크고 넓을 것인지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그 넓고 큰 허공계를 일곱가지 보배로 가득 채워서
타인을 위해 무상으로 베푸는 공덕과 복이야말로
한량이 없을 것이온대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서는
그 공덕이 있다면 언젠가는 다하는 날이 있을 것이매
설령 있다 하여도 다함이 있는 유루복이라 할수 있습니다
만약 통장의 큰 액수의 저금이라도
빼서 쓰기로만 하면 순간에도 다 없어 지듯
유루복이란 다함이 있는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금강경에서의 네구절의 게송을
타인을 위해 들려 주고 가리켜 줌은
그와 같은 복과는 비교도 할수 없을만큼 크다 하시는데
왜 그럴까요
이 사구게송은 나와 남에게
바로 다함 없는 복덕을 짓고 이루게 하는
근원적인 가르침이 되므로
그 법을 나누고 가르치는 복덕이
그만큼 크다 하시는 것입니다
이 크다는 말도 굳이 표현할수 있는 언어가 부족하기에
그저 크다고 할뿐이지만 크다는 말로 비교 할수 없는
상대를 떠난 큼입니다
그리하여 그 수많은 복덕을 영원히 그치지 않고
지어 가게 하는 가르침 하나는
우리들이 다겁생을 두고 윤회하던
중생의 살림을 마치게 하여
마침내 위없으신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 가게 하는 가르침이 되니
우리가 첫머리에서 살펴본대로
일체 모든 생명들로 하여금
위없는 깨달음과 행복의 세계로 나아 가게 하는 것으로
위 없는 깨달음을 성취하라 하시는
부처님의 부촉을 올바르게 실천함이 됩니다)
12. 尊重正敎分 第十二
復次須菩提 隨說是經 乃至四句偈等 當知此處 一切世間天人阿修羅
부차수보리 수설시경 내지사구게등 당지차처 일체세간천인아수라
皆應供養 如佛塔廟 何況有人 盡能受持讀誦 須菩提 當知是人
개응공양 여불탑묘 하황유인 진능수지독성 수보리 당지시인
成就最上第一希有之法 若是經典所在之處 卽爲有佛 若尊重弟子
성취최상제일희유지법 약시경전소재지처 즉위유불 약존중제자
12. 바른 가르침을 존중하는 것은
아난 스님은 다시
이렇게 들으셨다고 하십니다
부처님은 강조하여 말씀 하시기를
마땅히 아십시요 수보리여
이 경중에 사구게를 설하여 주고 배우는 곳은
일체 모든 세간의 하늘 사람과 아수라등이 모여 공양하기를
부처님 모신 탑이나 절에 경배하듯 할것인데
하물며 사람이 있어서
이경을 지니고 독송하는 것이야
말할 필요 있을 것입니까
수보리여
응당 이렇게 알지니
이 사람은 최고로 뛰어 나고 희유한 법을
성취한 것이 되며
이 경전이 머물러 있는 곳은
부처님이 계신 것과 같고
부처의 제자가 있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하셨답니다
*********
이 글을 보고 읽는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 가는 생명중의 하나인
인간이예요
그렇다 보니 우리보다
낮은 차원의 생명들은 알아 볼수 있어도
높은 차원의 생명들을 알아 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물론 낮은 차원도 알아 볼수 잇는 분야에
한계가 잇기는 마찬 가지입니다
그런데 깨달음을 성취하신 분들 눈에는
천상의 생명들이며 아수라라 불리우는 생명들처럼
인간보다는 조건이 나은 천상의 생명들이 있어서
그들조차도 이런 금강경이 있는 곳이나
수지 독송하는 이들이 있으면 받들어 모시고
공경 찬탄 한다 하니 참 대단한 일이라 생각 됩니다
사실 천상의 생명들은 인간 세계보다 수명이나 물질 정신등
모든 면에서 훨씬 좋은 조건으로 살아 간답니다
그렇다 보니고통은 적고 불편이 작으므로 해서
더 위 없는 깨달음의 길로 나아 가는 향상의 기회가
오히려 낮은 세계에서 고통을 겪으며
해탈을 서원하는 인간의 경우보다 더 적다는군요
그러니 우리가 지금 인간 세계에 머물며 살고 있음은
향상의 길로 나아 가는 커다란 관문이나 마찬가지로
천상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 이상의
영원한 행복 즉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 갈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것이죠
그러니 우리들은 하루 이십사시간 내내
바른 가르침에 의지하고 수행하고 살아 가는 것으로
영원을 살아 가는 힘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우리 주위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천신들이
둘러 싸고 보호하며 기뻐하고 찬탄한다니
이루고자 하는 모든 일이 성취되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가는 길은 부처님이 가시는 길이고
머무는 곳은 부처님이 머무시는 도량이며
하늘 사람들이 모여와 모시고 배우니 얼마나 좋습니까
공부면 공부 건강이면 건강 행복이면 행복
심지어는 바른 믿음으로 정진하는 이들은
모두 단정하고 훌륭한 외모를 성취하게 되니
두마리 토끼를 다 잡는 셈이 되니
불교 학생회나 법회에 동참하여 부지런히 공부 하세요
마음의 평화가 외모로 드러 나고
나옹 스님 발원문에 나오듯
내 이름만 들어도 삼악도의 고통 벗어 나고
내 모습을 보는 이는 해탈도에 들게 하는 이들
그들이 바로 우리들이랍니다)
13. 如法受持分 第十三
爾時 須菩提 白佛言 世尊 當何名此經 我等 云何奉持 佛告須菩提 是經
이시 수보리 백불언 세존 당하명차경 아등 운하봉지 불고수보리 시경
名爲金剛般若波羅蜜 以是名字 汝當奉持 所以者何 須菩提 佛說般若波羅蜜
명위금강반야바라밀 이시명자 여당봉지 소이자하 수보리 불설반야바라밀
卽非般若波羅蜜 是名般若波羅蜜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所說法不
즉비반야바라밀 시명반야바라밀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소설법부
須菩提 白佛言 世尊 如來無所說 須菩提 於意云何 三千大千世界 所有微塵
수보리 백불언 세존 여래무소설 수보리 어의운하 삼천대천세계 소유미진
是爲多不 須菩提言 甚多 世尊 須菩提 諸微塵 如來說非微塵 是名微塵
시위다부 수보리언 심다 세존 수보리 제미진 여래설비미진 시명미진
如來說世界 非世界 是名世界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三十二相 見如來不
여래설세계 비세계 시명세계 수보리 어의운하 가이삼십이상 견여래부
不也 世尊 不可以三十二相 得見如來 何以故 如來說三十二相 卽是非相
불야 세존 불가이삼십이상 득견여래 하이고 여래설삼십이상 즉시비상
是名三十二相 須菩提 若有善男子善女人 以恒河沙等身命 布施
시명삼십이상 수보리 약유선남자선녀인 이항하사등신명 보시
若復有人 於此經中 乃至受持四句偈等 爲他人說 其福甚多
약부유인 어차경중 내지수지사구게등 위타인설 기복심다
13. 법답게 받아 지님에 대하여
그러자 수보리 스님이 부처님께 여쭈었답니다
부처님이시여 자비로운 스승이시여
이 경전의 이름은 무엇이며
저희들이 어떻게 받아 지니면 되겠습니까
그러자 부처님은 수보리와 제자들에게
이 경전의 이름은
다이아 몬드와 같이 빛나는 지혜로
저 언덕에 이르는 경전(지혜의 완성)이라 이름할 것이니
그대들은 마땅히 이렇게 받아 지니십시요
수보리여 부처가 경의 이름을
지혜의 완성이라 말하여도
지혜의 완성이 아닌 것을
지혜의 완성이라 한것인줄 아십시오
수보리여
그대는 부처가 설한 법이 있다 생각합니까
수보리 스님은 답하기를
부처님이 설하신바 법이라 할 것이 없습니다
다시 부처님께서
수보리여 그대의 생각은 어떠합니까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티끌의 숫자가 많다 생각합니까
그러자 수보리 스님이
매우 많습니다 하고 대답을 하시니
부처님은 다시 말씀 하시기를
수보리여
모든 티끌은 티끌이 아닌 것을 티끌이라 이름 한것이요
세계라 하여도 세계 아닌 것을 부처가 세계라 한 것입니다
수보리여
만약 부처가 갖추었다는 서른두가지
거룩한 덕상을 갖춘이가 있으면
그 사람을 부처라 할수 있겠습니까
이 말씀에 수보리 스님은 얼른 대답 하기를
아닙니다 부처님이시여
서른두가지 덕상을 갖추었다 해도 부처라 할수 없습니다
왜 그런가하면 부처님이 말씀 하시는
서른두가지 덕상은
서른두가지 덕상이 아니온대
서른두가지라 말해 지는 것입니다
************
(이제 부처님의 간곡하신 가르침을
구릴 고추 세우고 듣던 수보리 스님은
부처님 전에
이 경전의 이름을 어떻게 하면 되겠는지요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이 경전의 이름을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 하십시요 하는
대목이 이 부분입니다
무릇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형태가 있건 없건
모두 이름이 있게 됩니다
지금 이 경을 설하시는 부처님도 석가모니라는 이름이 있고
묻고 듣는 제자들도 수보리며 아난이라는 이름이 있듯이
경전의 제목은 그 경 전체의 의미를 함축한 바가 되기에
경의 이름은 중요 합니다
부처님은 이 중요한 경전의 이름을
금강석이나 다이아몬드와 같은 굳고 빛나는 지혜로
위 없는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가리킨 경전이라
(지혜의 완성)이름 지으시면서 부연하시기를
지혜의 완성이라는 이름도
이름은 단지 이름이지 실제가 아닌 것을
확실히 하시고자 여러 말씀을 하십니다
불교를 말하는데 있어서
표월지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는 뜻으로
달을 가리켜 알리고자 손가락으로 일러 주는데
어둑한 사람은 손가락이 달인줄 아는 것을 말합니다
불교라고 설해진 불교(팔만대장경)조차도
달(진리)를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은 것입니다
그처럼 이름은 무엇인가를 지칭하거나
알려 주는 수단이요 방편인데 자칫 수단과 방편이
진실인줄 알기 쉽습니다
그렇다 보니 설법이 많다든가 적다라든가
티끌이라든가 세계라든가 하는 것은 서로
상대적인 것이기에 고정적인 티끌이나 세계가
있는 바가 아니고
티끌이 모여 세계가 되고
세계가 흩어져 티끌이 되는 것이기에
티끌이 곧 세계요 세계가 티끌인것이지
티끌은 티끌, 세계는 세계로서
확정 지어져 잇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부처나 전륜왕이 갖추고 있다는 서른 두가지 덕상도
그저 이름 지으려 하니 서른 두가지일뿐
어찌 서른 두가지로 규정 지을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부처님은 후에
모양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는 이는
삿된 길을 행하는 것으로
나를 보지 못한다 하는 것입니다)
14. 離相寂滅分 第十四
爾時 須菩提 聞說是經 深解義趣 涕淚悲泣 而白佛言 希有世尊 佛說如是甚深經典
이시 수보리 문설시경 심해의취 체루비읍 이백불언 희유세존 불설여시심심경전
我從昔來所得慧眼 未曾得聞如是之經 世尊 若復有人 得聞是經 信心淸淨 卽生實相
아종석래소득혜안 미증득문여시지경 세존 약부유인 득문시경 신심청정 즉생실상
當知是人 成就第一希有功德 世尊 是實相者 卽是非相 是故 如來說名實相 世尊
당지시인 성취제일 희유공덕 세존 시실상자 즉시비상 시고 여래설명실상 세존
我今得聞如是經典 信解受持 不足爲難 若當來世 後五百歲 其有衆生 得聞是經
아금득문여시경전 신해수지 부족위난 약당내세 후오백세 기유중생 득문시경
信解受持 是人 卽爲第一希有 何以故 此人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
신해수지 시인 즉위제일희유 하이고 차인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상
所以者何 我相 卽是非相 人相衆生相壽者相 卽是非相 何以故 離一切諸相 卽名諸佛
소이자하 아상 즉시비상 인상중생상수자상 즉시비상 하이고 이일체제상 즉명제불
佛告須菩提 如是如是 若復有人 得聞是經 不驚不怖不畏 當知是人 甚爲希有
불고수보리 여시여시 약부유인 득문시경 불경불포불외 당지시인 심위희유
何以故 須菩提 如來說第一波羅蜜 卽非第一波羅蜜 是名第一波羅蜜 須菩提
하이고 수보리 여래설제일바라밀 즉비제일바라밀 시명제일바라밀 수보리
忍辱波羅蜜 如來說非忍辱波羅蜜 是名忍辱波羅蜜 何以故 須菩提 如我昔爲歌利王
인욕바라밀 여래설비인욕바라밀 시명인욕바라밀 하이고 수보리 여아석위가리왕
割截身體 我於爾時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 何以故 我於往昔節節支解時
할절신체 아어이시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상 하이고 아어왕석절절지해시
若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應生嗔恨 須菩提 又念過去於五百世 作忍辱仙人
약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응생진한 수보리 우념과거어오백세 작인욕선인
於爾所世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 是故 須菩提 菩薩 應離一切相
어이소세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상 시고 수보리 보살 응리일체상
發阿뇩多羅三먁三菩提心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生無所住心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응생무소주심
若心有住 卽爲非住 是故 佛說菩薩 心不應住色布施 須菩提 菩薩 爲利益一切衆生
약심유주 즉위비주 시고 불설보살 심불응주색보시 수보리 보살 위이익일체중생
應如是布施 如來說一切諸相 卽是非相 又說一切衆生 卽非衆生 須菩提 如來
응여시보시 여래설일체제상 즉시비상 우설일체중생 즉비중생 수보리 여래
是眞語者 實語者 如語者 不思語者 不異語者 須菩提 如來所得法 此法 無實無虛
시진어자 실어자 여어자 불광어자 불이어자 수보리 여래소득법 차법 무실무허
須菩提 若菩薩 心住於法 而行布施 如人 入闇 卽無所見 若菩薩 心不住法 而行布施
수보리 약보살 심주어법 이행보시 여인 입암 즉무소견 약보살 심부주법 이행보시
如人 有目 日光明照 見種種色 須菩提 當來之世 若有善男子善女人 能於此經
여인 유목 일광명조 견종종색 수보리 당래지세 약유선남자선녀인 능어차경
受持讀誦 卽爲如來 以佛智慧 悉知是人 悉見是人 皆得成就 無量無邊功德
수지독송 즉위여래 이불지혜 실지시인 실견시인 개득성취 무량무변공덕
14. 상을 여의니(모든 생각을 쉬니) 적멸(본질)이 드러남이라
아난 스님이 말하기를
수보리 스님은
부처님 가르침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부처님에게 말씀 드렸답니다
부처님이시여
참으로 희유하고 드문 일입니다
부처님께 이같은 경전을 듣자오니
제가 지금까지 얻은 바로는 이같이
지혜로운 가르침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부처님이시여
만일 어떤 사람이 이경의 가르침을 듣고
믿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맑으면
곧 실상을 증득할 것이니 이 사람은
참으로 드문 공덕을 성취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부처님이시여
실상이라고는 하나 실상이 아닌 것을 일러
부처님은 실상이라 하시나이다
부처님이시여
제가 이같은 경전을 들어 믿고 알며
받들어 행함은 어렵지 않으련마는
만일 앞으로 이천 오백년 후에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듣고 그대로 믿고 알고 받아 지니면
이 사람은 참으로 드문 사람일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나라든가 너라든가 중생이나 목숨이라는 등의
마음에 관념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나 너 중생 목숨등의 관념은 실제가 아닌 것으로
이 모든 관념을 여의면(없으면)
바로 부처라 할것입니다
아난 스님은 그같은 수보리의 말을 듣고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 하셨다고 합니다
그렇고 그러 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서
이 경의 가르침을 듣고 놀라거나 두려워 하거나
겁을 내지 않는 이가 있다면 이 사람은 매우 드문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부처가 설하는 위없는 깨달음의 길에 이르는
첫번째 덕목이라 하는 보시 바라밀도
보시바라밀이 아닌것을 보시 바라밀이라 하는 것이며
인욕바라밀도 인욕바라밀이 아닌 것을
인욕바라밀이라 한것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여
내가 전생에 가리왕과 만날때
몸을 베이고 잘리고 하면서
마음에 나와 너 그리고 중생과 목숨이라는 관념이
없었습니다
만약 내가 마디 마디 사지를 찢기고 잘릴 때
네가지 관념이 내게 있었다면
나는 마땅히 성을 내고 왕을 원망하였을 것입니다
수보리여
나는 그렇게 한번의 생이 아니라
오백생을 태어 나는 동안 아무런 관념 없이
그렇게 인욕바라밀을 수행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보리여
선남자와 선녀인들은 마땅히 마음 속에
모든 관념을 여의고서 위없는 깨달음을 얻고자
마음을 내야할 것이니
물질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것이요
소리 냄새 맛 촉감 법등 어느 것에도
마음을 머무르지 않고 마음을 내야 합니다
만약에 마음이 어느것에 머무르는 바가 되면
바르게 머문다 할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처는 이렇게 말합니다
위 없는 깨달음의 마음을 낸 이(보살)은
물질등에 집착함이 없이 베풀어야 하고
일체 중생을 위하여 이같이 베풀고 나누어야 합니다.
부처가 말하는 모든 관념의 상은 상이 아니며
일체 중생이라 하는 것도 중생이 아닙니다
수보리여
부처는 참다운 말을 하는 이며,
실다운 말 을 하는 이며,
사실과 같이 말하는 이며,
거짓을 말하지 않는 이며,
속임이 없는 말만 하는 사람입니다
수보리여
부처가 얻은 바 법이라는 것은
실답다거나 허망함도 없는 것입니다.
수보리여
만일 보살이 마음을 법에 머물러 보시를 행하면
마치 사람이 어둠속을 들여다 보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이 소용이 없으며
보살이 법에 머물지 않는 마음으로 보시하면
마치 눈 있는 사람이 햇빛이 밝게 비친 곳에서
갖가지의 모양을 보는 것과 같이 밝은 것입니다.
수보리여
장차 오는 세상에
어떤 선남자 선녀인이 있어
능히 이 경을 수지하고 독송하면
모두가 무량무변의 공덕을 얻음을
부처는 부처의 지혜로써 다 알고 있습니다
************
여기 이 금강경에서 부처님을 스승으로 하여
문답하는 스님은 수보리 스님입니다
부처님 제자중에는 해공 제일의 제자 소리를 듣는
공 사상을 제일 잘 깨들은 분입니다
그러한 분이 부처님과의 몇 말씀을 나누시고는
이처럼 희유한 가르침을 처음 들으며
정말로 마음 속 깊이 우러 나오는
감사와 공경의 눈물 흘림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여기서 쉽게 믿기 어렵고
쉽게 긍정하기 어려운 가르침을 만납니다
왜냐하면 이 경전의 가르침을 들어
믿고 알고 행하는 사람은 참으로 희유한 사람이며
그럴수 있는 사람은 누누이 강조되는
아상 인상등 나와 너 중생과 수명이라는
관념을 비워 버린이라 하시며
진정으로 그런 모든 마음의 관념상을 여의면
그 사람이 부처라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으며 전하는 우리가
그와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라니
우리는
크게 하는 일도 없이 믿기만 하고 실천하기만 하여도
모두 부처가 된다니 이 말을 믿기가 쉽겠습니까
그런데 나아가서
부처님이 실천 하라시는 대승 불자의 덕목인
보시 바라밀
지계 바라밀
인욕 바라밀
정진 바라밀
선정 바라밀
반야 바라밀등에 있어서
실천은 낱낱이 빠짐 없이 행하되
행하여 이룬 것을 절대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일체 모든 생명들에게 공을 돌리라 하시는 것이니
거기에 내가 있으면 이미 그르친것이라
이것을 행한다 하여도 행하는 주체가 없는
다만 이름일 뿐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사대 색신 백천마디를 마디 마디 끊어 내도
내가 아프다
네가 그렇게 했다는 등의 나와 너
그리고 중생으로서 갖게 되는 마음이나
목숨에 대한 애착등이 조금이라도 일어 나지 않아야
진정한 인욕 바라밀을 성취 한것이며
그렇게 인욕 바라밀을 성취하게 되면
인욕바라밀이라 할것이 없다는 말씀이고
그것을 인욕바라밀이라한다는 말씀이시니
참으로 큰 믿음이 아니면 믿기 어려운 바라 할것입니다
만약 진정으로 인욕바라밀을 성취 하였다면
나가 없어야 하고 나가 없으매
인욕 바라밀이란 말도 없다 하는 것입니다
누가 나를 반말로 부르거나 쿡하고 쥐어 박아도
금방 욱하는 마음이 일어 나는 우리들을 보아서는
도저히 불가한 일인데
이 가르침을 온전히 믿고 이해 하면
그렇게 된다 하고 되어야 한다 하시는 것이지요
이처럼 보시 바라밀을 성취함도
주는 나와 받는 너 그리고
주어지거나 받는 물건의
좋고 낮음등 모든 것에 있어서
나와 너 중생과 수명이라는
관념이 모두 끊어져서
주어도 준바 아니요
받아도 받은 바 아니게 되면
그것이 진정한 보시 바라밀을 실천함이라 하시니
이 얼마나 믿고 받아 들이기 어려운 가르침일까마는
지금 우리는 그것을 믿고 받아 읽고 외우고
남을 위해 전하는 전법자 되었으니
참으로 드물고 귀한 사람이며 필경에는
위 없는 깨달음 성취한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알게 되면
거기에는 중생도 없고
법도 없으며
제도 함도 없고
실다움이나 허망함이 없는 것입니다
(3단원에서 사생구류의 일체 모든 생명들을
위없는 깨달음의 길로 인도 하여도 한생명도
제도된바가 없다는 가르침을 기억해 보세요)
하여 이렇게 설하시는 부처님은
참답고 실답고 사실대로 말하시며
거짓이나 속임을 말하지 않는 분으로
이와 같이 모든 마음의 관념의 상을 여의고
바라밀을 완성하는 선남자 선녀인들이 성취하는
무량 무변의 공덕을 다 안다 하시는 것입니다
15. 持經功德分 第十五
須菩提 若有善男子善女人 初日分 以恒河沙等身 布施 中日分 復以恒河沙等身 布施
수보리 약유선남자선녀인 초일분 이항하사등신 보시 중일분 부이항하사등신 보시
後日分 亦以恒河沙等身 布施 如是無量百千萬億劫 以身布施 若復有人 聞此經典
후일분 역이항하사등신 보시 여시무량백천만억겁 이신보시 약부유인 문차경전
信心不逆 其福 勝彼 何況書寫受持讀誦 爲人解說 須菩提 以要言之 是經
신심불역 기복 승피 하황서사수지독송 위인해설 수보리 이요언지 시경
有不可思議不可稱量無邊功德 如來爲發大乘者說 爲發最上乘者說
유불가사의불가칭량무변공덕 여래위발대승자설 위발최상승자설
若有人 能受持讀誦 廣爲人說 如來 悉知是人 悉見是人
약유인 능수지독송 광위인설 여래 실지시인 실견시인
皆得成就不可量不可稱無有邊不可思議功德
개득성취불가량불가칭무유변불가사의공덕
如是人等 卽爲荷擔如來阿뇩多羅三먁三菩提
여시인등 즉위하담여래아뇩다라삼먁삼보리
何以故 須菩提 若樂小法者 着我見 人見 衆生見 壽者見 卽於此經 不能聽受讀誦
하이고 수보리 약요소법자 착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 즉어차경 불능청수독송
爲人解說 須菩提 在在處處 若有此經 一切世間天人阿修羅 所應供養
위인해설 수보리 재재처처 약유차경 일체세간천인아수라 소응공양
當知此處 卽爲是塔 皆應恭敬 作禮圍요 以諸華香 而散其處
당지차처 즉위시탑 개응공경 작례위요 이제화향 이산기처
.. 15. 경을 지니는 공덕에 대하여 거듭 설하시다
수보리여
착한 사람들이 갠지스 강의 모래 수만큼의 몸으로
아침 점심 저녁 하루 세때를 빠짐 없이 보시하여
하루 이틀에서 무량 백천만 억겁동안 보시하여도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듣고
믿는 마음이 변치 아니하면
그 복이 몸을 그렇게 몸을 보시한 복덕보다 훨씬 많거든,
하물며 이 경을 쓰고 수지하며 독송하고
사람을 위해 해설해 줌에 있어서야 말할 필요 있겟습니까
수보리여
요약해 말하면 이 경에는 불가사의하고
가히 헤아릴 수 없는 가없 는 공덕이 있으므로
여래는 대승의 마음을 발한 이를 위하여 설하며,
최상승의 마음을 발한 이를 위하여 설하는 경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을 잘 수지하고
독송하며 널리 사람을 위하여 설하면
부처는 지혜로써 이 사람을 다 알고 보며,
가히 헤아릴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며
가 없는 불가사의한 공덕을 성취케 합니다
그리하여 이같은 사람들은 곧
부처의 아녹다라삼먁삼보리(위 없는 깨달음)를
같이 나누어 짊어진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만일 작은 법을 즐기거나 만족하는 사람은
나라든가 널, 중생 수명등에 사로잡혀 있기에
이 경의 깊은 가르침을 알아 듣거나
받아 지니거나 독송하거나
타인을 위해 해설해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수보리여
이 경전이 있는 곳은 어디나
모든 세계의 천신이나 아수라등의 공양을 받으며
부처의 탑을 모신 도량이 되어
모두 다 와서 공경하고 절하며
싸고 돌으며 꽃과 향을 흩 뿌릴 것을
마땅히 아십시요
***********
부처님은 앞에서도 말하셨지만
다시 한번 이 경을 지니고 공부하는 이들의
복덕의 수승함을 비유로 말씀 하십니다
인도의 강가라는 이름의 강이 갠지스 강입니다
한번 몸을 담그기만 하여도
모든 업장이 소멸된다는
믿음이 있는 강으로
강옆이나 바닥에 있는
모래알의 수를 생각해 보세요
강 모래 수만큼의 갠지스 강이 있어
그 모든 갠지스 강의 모래 알수 만큼의
삼천대천 세계를 칠보로 채워 보시하는
복덕과 이 경을 지니는 복덕을 비교한 경문이 있었습니다
여기서는 갠지스강의 모래 알수만큼의 몸이니
얼마나 많을까마는 그 많은 몸으로
아침 점심 저녇 하루 세때를 남을 위해 보시하는데
하루 한달 일년이 아닌 수로 헤아릴수 없는 오랜 겁동안을
행하는 복덕을 적지 않음을 말씀 하시면서
그 복덕과 비교하여
경문을 듣고 믿음이 변치 않는 것이
복덕으로는 더욱 크며
쓰거나 인쇄하고 지니고 독송하여
타인에게 전해 주는 것은 앞의 공덕보다
더욱 수승함을 말하십니다
(자각각타=나도 깨닫고 남도 깨닫게 함)
그리하여 이 법은 대승 불자를 위하여 설하시며
최상승의 근기를 지닌 이들을 위해 설하는 바로
이들이 경을 수지독송하고 사람을 위해 설하는 것을
부처는 부처의 눈으로 다 알고 보며 마침내는
한 없고 말로 다할수 없는 가없는 공덕을 성취하여
이와 같은 이들이
부처의 위없는 깨달음을 나누어 짊어 지고
중생들을 위한 삶을 산다 하십니다
그러면서 작은 법이나 자신의 평안에만
만족하고 안주하고자 하는 이들은
나와 남,중생과 수명등의 상에 가려
이 경을 들어 수지 독송하거나
타인을 위해 해설해 주지 못한다 하시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은 대승의 가르침이 일어 나기 전의
개인의 해탈과 열반을 추구하는
소승적인 견해를 가진 이들과의 비교되는 말씀 같으나
당시 인도 사상계에 지배적이던 바라문이나
사마나라고 일컬어 지던 출가 수행자들과의
비교이신듯 합니다
부처님의 제자들은 아닌.
그러시면서 이 경이 있는 곳은 탑과 절과 같아
천신과 아수라등의 공양 예배 헌화 헌향하신다 하니
우리 불제자들이 금강경을 읽고 독송하는 공덕이
얼마나 큰가를
다시 한번 강조 하시는 가 합니다
우리는 사람으로 나기 어려운데 사람으로 나왔고
불법 만나기 어려운데 불법 만났으며
그중에 이 금강반야바라밀경을 공부하는
사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하고 기뻐할 일인가요
앞 단원에서 수보리 존자의
눈물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16. 能淨業障分 第一六
復次須菩提 善男子善女人 受持讀誦此經 若爲人輕賤 是人 先世罪業 應墮惡道
부차수보리 선남자선녀인 수지독송차경 약위인경천 시인 선세죄업 응타악도
以今世人 輕賤故 先世罪業 卽爲消滅 當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 須菩提
이금세인 경천고 선세죄업 즉위소멸 당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수보리
我念過去無量阿僧祗劫 於燃燈佛前 得値八百四千萬億那由他諸佛
아념과거무량아승지겁 어연등불전 득치팔백사천만억나유타제불
悉皆供養承事 無空過者 若復有人 於後末世 能受持讀誦此經 所得功德
실개공양승사 무공과자 약부유인 어후말세 능수지독송차경 소득공덕
於我所供養諸佛功德 百分不及一 千萬億分 乃至算數譬喩 所不能及
어아소공양제불공덕 백분불급일 천만억분 내지산수비유 소불능급
須菩提 若善男子善女人 於後末世 有受持讀誦此經 所得功德 我若具說者
수보리 약선남자선녀인 어후말세 유수지독송차경 소득공덕 아약구설자
或有人 聞 心卽狂亂 狐疑不信 須菩提 當知是經義 不可思議 果報 亦不可思議
혹유인 문 심즉광란 호의불신 수보리 당지시경의 불가사의 과보 역불가사의
16. 경을 지니고 독송하며 업장을 깨끗이 하다
부처님은 다시 이렇게 설하셨어요
수보리여
이 경전을 수지 독송하는 훌륭한 남녀 수행자라도
때로는 그로 인해 경멸과 천대를 당하기도 하는데
이런 경우에 이 사람은
전생의 지은 업이 중하여 악도에 떨어질 연이 있다 해도
금생에서 사람들의 경멸과 천대를 받음으로 해서
전생에 지은 업이 소멸되고 마땅히
위 없는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다시 수보리여
내가 지난 과거세에 헤아릴수 없는 아승지겁까지
거슬러 생각해 보면 연등 부처님의 수기를 받기 전에도
팔만사천만억나유타의 수만큼의 여러 부처님을 뵙고
공양하고 뜻을 받들어 섬기는 일을
한분도 소홀히 한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만일 어떤 사람이 있어서 말세에
이 경전을 수지 독송하여 얻게 되는 공덕은
앞에 내가 여러 부처님을 공양한 모든 공덕으로도
백분의 일 내지는 천만억분의 일도 미치지 못합니다
수보리여
만일 내가 선남자 선녀인이 말세에
이 경을 수지독송하여 얻는 공덕을
다 갖추어 말하기로 한다면
혹 어떤 사람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곧 혼란하고 의심하여 믿지 않을 것입니다
수보리여,
이 경의 뜻은 가히 다
말하거나 생각할 수도 없으며
그 과보도 또한 가히 다
말 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
(부처님의 금강반야의 가르침은
당시의 인도 사상계와 종교계를
뿌리채 한꺼번에 흔들어 놓는
일대 혁명적인 가르침입니다
왜냐하면 아트만이라는 나가 있어서
범천과 하나라는 범아일여의 사상이나
그를 믿는 이들에게 있어서
바로 무아 즉 나라 할만한 것은 없다라는
안아트만을 선언하시는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삼법인중에 처음이
제법무아로서 이 세상 모든것들 속에
아무리 찾아 보아도 나는 없더라 하시는 가르침은
인도의 종교계와 출가 사문들의 마음 속에서
벽력같이 번쩍하고 스쳐 지나치는 빛이었어요
그렇다보니 눈 밝고 상근기의 대승 행자들은
그를 이해하고 믿고 받들어 정진하여도
그렇지 못한 종교인들이나 사상가들에게서
부처의 가르침인 무아의 사상으로 정진하는 이들은
천대와 멸시를 받을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런 경우를 미리 예상 하신듯
설령 그런 천대와 멸시가 있다 하더라도
걱정하거나 염려할 일이 아니라 말씀 하십니다
왜냐하면 오히려 그런 경우에
우리가 전생에 살아 오면서 지었음으로 해서
삼악도에 떨어 지는 업을 정화하는 도움이 된다
말하시는 것입니다
왜 이것이 가능 할까요
그것은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서
온전한 수행을 하는 이들은 한결같이
멸시나 천대를 받는 나가 없음을 알고
천대하는 상대도 없으며
상대로 인해 화내는 중생의 마음이 일지 않고
어디 두고 보자 하고 마음에 업으로 새기는 이들이
아니기에 그것이 가능합니다
굳이 예를 들자면
바르고 법 없이도 살만한 이들이
자칫 영어의 몸이 되어서 자유를 구속당하기도 하는데
그들 중에는 오히려 그 시간을
자기 성장과 완성의 기회로 삼아서
큰 공부를 성취하고 사상을 정립하는 일도 있듯이
이 공부를 하는 이들에게 잇어서 닥쳐 오는 불행은
오히려 더 큰 향상의 길로 나갈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이에 이 경을 수지 독송하는 공덕을
부처님은 다시 한번 설하시는데
당신이 과거에 한량 없는 오랜 겁을 지나면서
무수억의 부처님께 공양 올리시고
섬겨 받드신 공덕이 적지 않다 하더라도
만약 그렇게 얻는 공덕으로
지금 우리가 이 금강반야바라밀경의 가르침을
수지독송하고 타인을 위해 설해주는 공덕과 비교하면
백분의 일이나 천만억분의 일에도 이르지 못한다고
거듭 설하시는 것입니다
하여 그 공덕을 다 갖추어 말하시자면
세간의 사람들이 제대로 알아 듣지 못할만큼
이 경의 뜻이 깊고 크며
수지독송하는 과보도 역시 크다는 말씀을
다시 한번 더 강조 하시면서
삼십이분중에 전반부가 되는 십육분이 마쳐 집니다
이렇게 전반부가 마쳐 짐으로 해서
부처님의 고구정령한 가르침이 온전히 설하여 졌음에도
부처님과 수보리 스님의 문답은 계속 되십니다)
17. 究竟無我分 第十七
爾時 須菩提 白佛言 世尊 善男子善女人 發阿뇩多羅三먁三菩提心 云何應住
이시 수보리 백불언 세존 선남자선녀인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운하응주
云何降伏其心 佛告須菩提若 善男子善女人 發阿뇩多羅三먁三菩提心者
운하항복기심 불고수보리 약선남자선녀인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
當生如是心 我應滅度 一切衆生 滅度一切衆生已 而無有一衆生 實滅度者
당생여시심 아응멸도일체중생 멸도일체중생이 이무유일중생 실멸도자
何以故 須菩提 若菩薩 有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卽非菩薩 所以者何
하이고 수보리 약보살 유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즉비보살 소이자하
須菩提 實無有法 發阿뇩多羅三먁三菩提心者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於燃燈佛所
수보리 실무유법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어연등불소
有法 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不 不也 世尊 如我解佛所說義 佛於燃燈佛所 無有法
유법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부 불야 세존 여아해불소설의 불어연등불소 무유법
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 佛言 如是如是 須菩提 實無有法 如來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불언 여시여시 수보리 실무유법 여래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須菩提 若有法 如來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者 燃燈佛 卽不與我授記 汝於來世
수보리 약유법 여래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자 연등불 즉불여아수기 여어내세
當得作佛 號釋迦牟尼 以實無有法 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 是故 燃燈佛 與我授記
당득작불 호석가모니 이실무유법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시고 연등불 여아수기
作是言 汝於來世 當得作佛 號釋迦牟尼 何以故 如來者 卽諸法如義 若有人 言
작시언 여어내세 당득작불 호석가모니 하이고 여래자 즉제법여의 약유인 언
如來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 須菩提 實無有法 佛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 須菩提
여래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수보리 실무유법 불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수보리
如來所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 於是中 無實無虛 是故 如來說一切法 皆是佛法
여래소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어시중 무실무허 시고 여래설일체법 개시불법
須菩提 所言一切法者 卽非一切法 是故 名一切法 須菩提 譬如人身長大 須菩提言
수보리 소언일체법자 즉비일체법 시고 명일체법 수보리 비여인신장대 수보리언
世尊 如來說人身長大 卽爲非大身 是名大身 須菩提 菩薩 亦如是 若作是言
세존 여래설인신장대 즉위비대신 시명대신 수보리 보살 역여시 약작시언
我當滅度無量衆生 卽不名菩薩 何以故 須菩提 實無有法 名爲菩薩 是故 佛說一切法
아당멸도무량중생 즉불명보살 하이고 수보리 실무유법 명위보살 시고 불설일체법
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 須菩提 若菩薩 作是言 我當莊嚴佛土 是不名菩薩 何以故
무아무인무중생무수자 수보리 약보살 작시언 아당장엄불토 시불명보살 하이고
如來說莊嚴佛土者 卽非莊嚴 是名莊嚴 須菩提 若菩薩 通達無我法者
여래설장엄불토자 즉비장엄 시명장엄 수보리 약보살 통달무아법자
如來說名眞是菩薩
여래설명진시보살
17. 마침내 [나]가 없음에 이르러
아난 스님은 수보리 스님이
부처님께 이렇게 여쭈었다고 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위없는 깨달음의 마음을 일으킨 선남자 선녀인은
응당 어떻게 살아가며 그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겠습니까?
그러자 부처님은 수보리 스님에게 이르시되,
만일 선남자 선녀인 가운데 아녹다라삼먁삼보리
(위없는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마음)를 발한 이는
마땅히 이러한 마음을 내어야 합니다
내가 마땅히 일체 중생을 열반에 이르도록 제도하리라 서원하고
그리고 일체중생 을 모두 제도하여도
한 중생도 실제로 제도된 이가 없다 라고
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만일 보살에게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에 그러합니다.
그 까닭은 수보리여,
실로 아녹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는 법이
따로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이 어떠합니까?
여래가 연등 부처님 처소에서 법이 있어서
아녹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하겠습니까?
수보리 스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이 설하신 뜻을 아는 바로는
부처님이 연등 부처님의 처소에 법이 있어서
아녹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그러하고 그러합니다.
수보리여,
진실로 법이 있어서
여래가 아녹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수보리여, 만일 법이 있어서
여래가 아녹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면
연등부처님이 나에게 수기하시기를
그대가 오는 세상에 반드시 부처가 되어
이름을 석가모니라 하리라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실로 아녹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바 법이 없기에
연등부처님께서 내게 수기를 주어 그대는 오는 세상에
마땅히 부처가 되어 이름을 석가모니라 하리라 수기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래라 하면
곧 제법에 여여하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여래가 아녹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말하더라도
수보리여, 실로 얻을 법이 있어서
부처가 아녹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은 없습니다.
수보리여, 여래가 얻은 바 아녹다라삼먁삼보리 가운데에는
실다움도 없고 허망함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래는 일체의 법이 다 불법이라 하는 것입니다.
수보리여, 일체법이라 설하는 것도
곧 일체법이 아닌 것을 일체법이라 하는 것입니다.
수보리여, 비유해서 말하면 사람의 몸이 크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자 수보리 스님은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사람의 몸이 크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곧 실로 큰 몸이 아닌 것을 큰 몸이라 하신 것입니다.
부처님이 설하시기를
수보리여, 보살도 또한 그와 같습니다,
만일 내가 마땅히 헤아릴 수 없는 중생을 제도한다라고 하면
곧 보살이라 이름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실로 법에조차도 걸림이 있으면 보살이라 이름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는 일체 법은
나도 없고 남도 없고 중생도 없고 오래 산다는 것도 없다고 하는것입니다.
수보리여,
만일 보살이 나는 마땅히
부처님의 나라를 장엄하리라 하고 말을 하면
보살이라 이름하지 못할 것이니,
왜냐하면 여래가 설한 바 불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곧 장엄함이 아닌 것을 장엄이라 한것입니다.
수보리여, 만일 보살이 무아의 이치에 통달한 사람이 있다면
이를 가리켜 여래는 참으로 진실한 보살이라 이름 합니다.
***************
이제 금강경의 후반부가 되는
구경무아분이 시작되는 단원에 이릅니다
무슨 까닭인지 수보리 스님은 다시
위 없는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마음을 머무르고
어떻게 마음 속의 번뇌를 항복 받을 것인가
하고 부처님께 여쭈어 봅니다
아마 중생들을 향한 간절한 비원이
대승 정종분에서 여쭈었던 내용과 같은
질문을 다시 드리게 되었나 봅니다
그러자 부처님도 저어 하시지 않으시고
다시 한번 일러 주시는데
위 없는 깨달음의 마음을 낸 이들은
일체 중생을 위 없는 행복의 길로 나아 가도록 도와 주되
그 같은 일을 모두 완벽하게 성취 하였다 하더라도
실제로 한 중생도 도움 받은 적이 없다 하라 하십니다
한마디로 끝 없는 보살행을 하라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내가 누군가를 도와 주거나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 곤란을 면하게 하였을 때
내가 저를이라는 나와 너
그리고 도움의 크기를 논하는 중생의 마음
그리고 저가 앞으로 어쩌나 두고 보자 하는 수자상에
괴로움을 받기가 쉽습니다
도움을 주는 행위 자체로 잊어야 하는데
그것을 오래 간직하고 기억하려다가
상대가 자신의 마음에 부합하는 행동이나
합당한 답례를 하지 않으면 오히려
도움을 주고서도 상대를 향한 좋지 않은 감정이 생깁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랑하지 말라 하시나 봅니다
사랑을 주고서 그에 상응하는 답이 없으면
오히려 사랑이 미움이 되고 사랑이 원망이 되니
그런 사랑이라면 차라리 사랑하지 말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이 중생의 사랑이라면
여기서 부처님이 설하시는 일체 중생을 향한 끝 없는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이요 무연 자비의 실천행인 동시에
보현 보살의 행원과도 같은 것입니다
미움도 그 자체로도 괴로운 것인데
오래도록 끌고 나가면 세세생생의 고통을 초래 하는 것인바
누가 밉다면 그저 그 순간으로 끝 내야지
마음에 담아 두어서는 홀연히 일어 난 한 생각이
스스로를 얽어 매는 질긴 동아 줄이 됩니다
경에 보면 부처님은 전생 어느 땐가
연등 부처님 처소에서 부처님을 친견하면서
후에 석가모니라는 이름의 부처가 되리라 수기 받으셨다 합니다
여기서 수기라는 것은
연등 부처가 선헤 행자가 부처 될것을 인정하시고
선혜 행자는 연등 부처에게 인정을 받으신 것이지만
거기에는 주고 받음 없이 주고 받고
줄 것(법)이 없음에 주고 받았기에
앞의 부처와 뒤의 부처가
마음에서 마음으로 주고 받았다 하는 것입니다
받을 나도 없고 받을 법도 없으며
없다는 것마저 없음을 알아
본시 연등과 선혜가 둘이 아님을 안 까닭에
선혜는 부처가 될수 있다는 수기를 받은 것입니다
이 법은 얻고 잃거나
허하고 실다움이 따로 있지 아니하여
모든 차별상을 떠난 것이며
법이다 법 아니다라는 관념조차 없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법을 여의고서는 존재 할수 없는 바인데
이것은 법이요 저것은 법이 아니요 하는 분별과 가름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크다 작다든가
꾸민다거나 더럽다거나 하는 차별도
한 마음에서 일어 난 것으로
원효 스님이 해골 바가지의 물을 달게 드시고서
밝은 날에 해골을 보시고는 구역질이 나는 것을 보면서
크게 깨달아 읊으신
삼계가 유심이요
만법이 유식이라
심생즉 종종 법생 하고
심멸즉 종종 법멸이라 하신 바와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여 구경에는 무아를 철견한 사람을 부처님은
진정으로 위 없는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사람의 전형인
보살이라 칭하시는 것입니다
무아를 철견한 보살의 숫자가 무진수로 늘어 난다 하여도
부처의 세계를 장엄하거나
부처의 세계가 더 아름다워 지는 것이 아니매
그저 일러서 불국토를 장엄한다 하시는 뜻이
그러합니다
나로 말미암아 만법이 일어 나더니
나가 본디 없음에 만가지 법이 모두 쉽니다
나도 없고 법이라 할바도 없어 모두가 공한 자리
미묘한 연꽃 한송이 진흙 뻘 속에 피어 납니다
18. 一切同觀分 第十八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有肉眼不 如是 世尊 如來 有肉眼 須菩提 於意云何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유육안부 여시 세존 여래 유육안 수보리 어의운하
如來 有天眼不 如是 世尊 如來 有天眼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有慧眼不 如是
여래 유천안부 여시 세존 여래 유천안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유혜안부 여시
世尊 如來 有慧眼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有法眼不 如是 世尊 如來 有法眼
세존 여래 유혜안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유법안부 여시 세존 여래 유법안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有佛眼不 如是 世尊 如來 有佛眼 須菩提 於意云何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유불안부 여시 세존 여래 유불안 수보리 어의운하
如恒河中所有沙 佛說是沙不 如是 世尊 如來說是沙 須菩提 於意云何
여항하중소유사 불설시다부 여시 세존 여래설시사 수보리 어의운하
如一恒河中所有沙 有如是沙等恒河 是諸恒河所有沙數 佛世界 如是
여일항하중소유사 유여시사등항하 시제항하소유사수 불세계 여시
寧爲多不 甚多 世尊 佛告須菩提 爾所國土中 所有衆生 若干種心 如來悉知
영위다부 심다 세존 불고수보리 이소국토중 소유중생 약간종심 여래실지
何以故 如來說諸心 皆爲非心 是名爲心 所以者何 須菩提
하이고 여래설제심 개위비심 시명위심 소이자하 수보리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
18.한몸으로 동일하게 봄
부처님이 물으셨어요
수보리여,
그대 생각에 여래가 육안이 있다 하겠습니까?
예.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육안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물으셨어요
수보리여,
그대 생각에 여래가 천안이 있다 하겠습니까?
그러합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천안이 있나이다.
부처님이 물으셨어요
수보리여,
그대 생각에 여래가 혜안이 있다 하겠습니까?
그러합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혜안이 있나이다.
부처님이 물으셨어요
수보리여,
그대 생각에 여래가 법안이 있다 하겠습니까?
그러합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법안이 있나이다.
부처님이 물으셨어요
수보리여,
그대 생각에 여래가 불안이 있다 하겠습니까?
그러합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불안이 있나이다.
부처님은
수보리여
그대 생각에 갠지스 강에 있는 모래를
부처가 모래라고 하는가요? 하고 물으셨어요
그러자 수보리 스님은
그러합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모래라고 하십니다 하고 답하셨어요
부처님은
수보리여,
그대 생각에 어떠한가요?
한 갠지스강 가운데 있는 모래 수 만큼의 갠지스강이 또 있어
이 모든 갠지스강에 있는 모래 수 만큼의
부처 세계가 있다면 그것이 많다 하겠습니까?
수보리스님은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하고 답하셨어요
그러자 부처님은 수보리 스님에게 이르시되,
그렇게 많은 국토 가운데 있는
중생들의 갖가지 마음을 여래는 다 압니다.
왜냐하면 여래가 말한 모든 마음은
마음이 아닌 것을 마음이라 일러 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여,
과거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음입니다.
***************
부처님에게는
우리와 같은 육안과
천인들이 갖는 천안
마음의 눈으로 진리의 세계를 밝게 보는 혜안
법을 밝혀 보는 법안
부처만이 지니는 부처의 눈등
오안이 있다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 다섯가지의 눈에 대해
수보리 스님에게 하나하나 물으시며
부처에게 그같은 눈이 있음을 확인하시는군요
그리고 나서
갠지스 강의 모래 알수를 비유로 들어
모래 알만큼의 국토가 다시 있고
다시 그 모래알수 만큼 많은 국토의
각 나라의 갠지스 강 모래를 합한 수만큼의
국토가 있다 하면
그 국토에 존재하는 중생들의 마음을
낱낱이 다 아신다 하시는 말씀 이시니
부처님의 능력은 과연
한계가 없다 할것입니다
한데 끝부분에서 우리가 유념하고 지나야 할 말씀이
그 낱낱의 마음이라는 것은
낱낱의 마음이 아닌 것을 마음이라 한것이니
과거의 마음이나
현재의 마음이나
미래의 마음이라는 것은
가히 얻을수 없다 하시는군요
결국 마음이라는 것은
한마음의 현현이요
우리네 마음 쓰는 것 하나하나가 모두
부처의 마음과 다르지 않음인데
중생들은 그것을
분리된 의식으로 나누어 과거 현재 미래를 나누고
좋고 싫고 이쁘고 밉고 등으로 보는 분리된 의식이라면
깨달은 이들 즉 부처는 그 모든 것을 둘이 아닌
하나로 보는 지혜를 갖춘 분들이라 하시는 것입니다
굳이 예를 들자면
우리 나라는 다도해 소리를 들을 만큼 섬이 많은 나라이지요
섬 각각마다 아름다운 이름이 붙어 있으나
물을 거둔다고 보면 이섬 저섬이 본디 하나의 대지입니다
그렇게 하나인것이 드러 나면
섬 각각의 이름은 어디에 붙여 볼데가 없는 것이지요
연을 심은 수반을 보면 잎과 줄기와 뿌리가 다 각각이고
꽃잎이나 봉오리 진것이 서로 다른 개체인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것이 한뿌리 한 인연으로부터 무수히 많은 모양으로
펼쳐진 바입니다
결국 이 사바세계와
무변 허공으로 펼쳐진 무수히 많은 국토와
그 국토에 실어 몸을 살고 있는 사생 구류의 중생들은
하나 하나가 서로 다른 개체인듯 보이지만
오안을 구족하신 부처의 눈으로 보면
모두가 하나요 한마음이며 한 부처의 세계이고
시방과 삼세가 그저 이름일 뿐입니다
하여 부처라 해도 오히려 맞지 않는 부처 세계입니다
전에 덕산 스님이라는 분이
금강경에 달통을 하여 소초를 붙이고 주석을 하여 다니며
세상에 내로라 하는 이들을 다 상대 하는데
남방의 선지식들이 참선을 하면서 불립문자 운운하며
깨달음을 논한다 소리를 듣습니다
이 무슨 해괴한 마구니의 소리인가 싶어
덕산 스님은 한바탕 바른 길을 일러 주겠다 길을 나서서
용담 숭신선사라는 이가 사는 절 밑에 이릅니다
마침 점심 때가 되어 주막에 들어 가니
주막집 노파가 등에 무겁게 진 짐이 무엇인가요
하고 묻습니다
덕산 스님은
내가 금강경을 풀이한 책으로
이를 덮을만한 가르침은 없다 하고
자랑합니다
그러자 노파는 나도 금강경을 조금은 아는데
내가 금강경에서 한가지 질문을 할 터이니
스님이 답하면 점심을 그냥 드리고
답을 못하면 굶고 가시지요 합니다
금강경의 대가인 덕산 스님은
코웃음이라도 치는 심정으로 한번 물으라 하니
노파가 묻는 말이
부처님이 금강경에서
과거의 마음도 얻을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수 없다 하시는데
과연 스님은 어느 마음에서 점심을 하시렵니까
하고 묻습니다
덕산 스님은 마음 속이 탁 막히고 답답하여
한마디 시원하게 답을 못하고 그날 점심을 굶을수 밖에
없었습니다
후일 용담 숭신 스님을 뵙고
마음 눈이 밝아져 금강경 소초를 불태워 버리고
다시는 타인과 자신에 속지 않는 안목을 지녔다지요
우리가 점심 한그릇 먹는 것도
눈 밝은 이에게는 먹거리가 되는 상대를
향상의 길로 인도하는 보살행이 되지만
어둑한 중생에게는
중생의 정육을 먹는 것이나 다를바 없어서
모든게 업이요 빚이며 갚아야 할 과보가 됩니다
육십억 인류와 수를 헬수 없는 중생들의 보금 자리인
이 지구라는 별도
무변 허공이 깨달음에서 나온 바임을 아는 선지식들에게는
한낱 미진수의 티끌중에 하나와 다름 아니며
각각의 티끌 낱낱마다 삼신과 사지를 갖춘
부처와 보살 성중들이 머무는 불국토 아님이 없슴입니다
****************
오안(다섯 가지 눈)....인용하였습니다
육안(肉眼).
육신의 눈.
천안(天眼).
일반적으로는 초인적 눈을 이르나,
천태의 교학에서는 색계(色界)의 천인(天人)이 소유하고 있는 눈.
중생의 미래의 생사를 볼 수 있는 눈.
혜안(慧眼).
일반적으로는 지혜의 눈 진리를 보는 눈의 뜻으로 쓰이나,
천태의 교학에서는 이승(二乘)의 눈으로 규정되어
일체의 현상은 공이어서 고유의 특질相이 없다고 보는 눈.
법안(法眼).
법을 바로 인식하는 눈.
천태의 교학에서는 보살이 일체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온갖 법문(法門)을 조견(照見)하는 눈.
불안(佛眼).
모든 것을 이해하는 부처님의 눈.
천태의 교학에서는 앞의 네 가지 눈을 구비한 부처님의 눈으로 친다.
19. 法界通化分 第十九
須菩提 於意云何 若有人 滿三千大千世界七寶 以用布施 是人 以是因緣 得福多不
수보리 어의운하 약유인 만삼천대천세계칠보 이용보시 시인 이시인연 득복다부
如是 世尊 此人 以是因緣 得福 甚多 須菩提 若福德 有實
여시 세존 차인 이시인연 득복 심다 수보리 약복덕 유실
如來 不說得福德多 以福德 無故 如來 說得福德多
여래 불설득복덕다 이복덕 무고 여래 설득복덕다
19. 법계에 통하여 교화함
부처님은
수보리여, 그대 생각에 어떠한가요?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 가득 채워 보시를 한다면
이 인연으로 해서 얻는 복덕이 많다 하겠습니까
하고 물으셨어요
수보리 스님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사람은 이 인연으로 얻는
복덕이 매우 많다 하겠습니다
부처님은
수보리여 만일 복덕이 진실로 있다면
여래가 복덕을 많이 얻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겠지만,
복덕이 없기 때문에 여래는
복덕을 많이 얻을 것이라고 설하는 것입니다
**************
칠보를 가지고 이 온 세계를 가득 채워
타인을 위해 보시하는데 얻어 지는 공덕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요
그런데 부처님은 이같은 보시행으로는
얻어 지는 공덕이 없다 하시네요
우리는 여기서 불교에서 말하는
유루복과 무루복의 차이를 공부할수 있습니다
유루복이란 언젠가는 다하여 없어지는 복이라는 뜻이고
무루복이란 아무리 오래 되어도 다함이 없이 영원하여
마치 복을 생산하는 근원이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일곱가지 보배를 가지고 한 없는 공덕행을 하여
무수히 많은 복을 지었다 하더라도
그 복이 언젠가 다함이 있게 되면 그 복은
많다고 하여도 많은 것이 아닌 바
써도 써도 다함이 없는 복덕을 지음이
진정한 공덕행일진대 그 공덕행을 이루는 것은
진리를 철견하고 무아의 이치를 바로 보아
마음에 머무름이 없는 공덕행을 닦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양무제와 달마 대사의 만남을 생각해 봅니다
불심 천자라 불릴만큼
불심이 깊었던 양무제는
온 나라의 국력을 다하여 절을 짓고
불상을 조성하며 스님들의 위해 공양을 베풀었다 합니다
불조의 혜명을 이은 달마 대사가 자신의 나라에 오자
양무제는 자연스럽게 달마 대사와 만나게 되고
양무제는 자신이 무수히 많은 사원과 불상을 조성한 공덕이
대단한 불사임을 과시하듯
이와 같은 공덕이 얼마나 되는가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달마 대사는
대단히 크고 많은 공덕이 된다라고 하지 않고
조금의 공덕도 없다 합니다
양무제는 금강경을 지송하기는 하였어도
아마 우리가 같이 살펴 본 무주상의 개념이나
응무소주이생기심의 가르침은 마음에 없었던가 봅니다
양무제처럼
자신이 지은 공덕행의 과보에
아직 마음이 머물고 있는 한은
아직 진정한 공덕을 지었다 할수 없는 것입니다
공덕을 짓고
복덕을 쌓고
보시를 행하고
희생을 하면서도
거기에 짓고 행하는 나라는 관념과
행위에 대한 댓가를 바라는 마음이 쑥 빠져 버릴때
진정 그 공덕은 무루복을 짓는 공덕행이 되고
거기에는 복이 많다 적다는 개념의 말이 붙을수 없습니다
하물며 우리 선남자 선녀인들은
부처님이 부촉하신 바
일체 중생을 위 없는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되
한 중생도 제도 된바가 없다는 마음으로 타인을 위한
쉼이 없는 바라밀행을 하기로 마음 먹은 사람들이니
쉼이 없이 바라밀행을 하되
놓고 가고 놓고 가는 사람들인데
어찌 자기가 지은 크고 작은 복덕의
크기나 재고 있을 한가한 시간이 있겠습니까
원효 스님은
삼일수심은 천재보요
백년탐물은 일조진이라 하시니
삼일동안 닦는는 마음은 천년을 가는 보배요
백년을 탐한 물질을 하루 아침 티끌과도 같다 하심도
그같은 내용입니다
이같은 게송이 있어서 소개해 봅니다
약인정좌일수유(若人靜坐一須臾)하면
승조항사칠보탑((勝造恒沙七寶塔)이니라.
보탑필경화위진((寶塔畢竟化爲塵)이나
일념정심성정각(一念淨心成正覺)이니라.
만약 어떤 사람이 고요히 앉아 잠시라도 일념에 들면
그 공덕이 항하사 모래수의 칠보탑을 쌓는 것보다 크다.
보탑은 반드시 쇠락하여 무너지고 흩어져 흔적이 사라지지만
한 생각 맑은 마음은 깨달음을 이루게 해주기 때문이니라.
20. 離色離相分 第20
須菩提 於意云何 佛 可以具足色身 見不 不也 世尊 如來 不應以具足色身 見
수보리 어의운하 불 가이구족색신 견부 불야 세존 여래 불응이구족색신 견
何以故 如來 說具足色身 卽非具足色身 是名具足色身 須菩提 於意云何
하이고 여래 설구족색신 즉비구족색신 시명구족색신 수보리 어의운하
如來 可以具足諸相 見不 不也 世尊 如來 不應以具足諸相 見
여래 가이구족제상 견부 불야 세존 여래 불응이구족제상 견
何以故 如來 說諸相具足 卽非具足 是名諸相具足
하이고 여래 설제상구족 즉비구족 시명제상구족
20. 색과 모양을 여읨
부처님은 말씀 하셨어요
수보리여,
그대 뜻에 어떠한가요?
부처를 가히 색신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겠습니까?
수보리스님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를 보되 응당 색신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써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이 설하신 색신을 갖추고 있다는 것은
색신을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닌 것을 색신을 갖추었다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다시
수보리여,
그대의 생각은 어떠 한가요?
여래를 가히 모든 상을 구족한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까?
수보리는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응당 모든 상을 구족한 것으로써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가 말씀하신 모든 상을 구족하고 있다 하는 것은
곧 모든 것을 구족한 것이 아닌 것을
모든 상을 구족했다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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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은
삼신 즉 세가지 몸과 사지 즉 네가지 지혜를
구족하신 분으로 삼신이라는 것은
법신과 보신과 화신을 말합니다
법신(法身)이란,
깨달으신 진리가 바로 부처님의 본질이라는 입장입니다.
이러한 부처님 즉 법신불을 비로자나 부처님이라고 합니다.
보신(報身)이란,
부처님은 일정한 서원(誓願)이나 수행의 과보(果報)로서
부처님이 되셨으므로 부처님의 또 다른 본질은
그와 같은 수행 내지는 원력이라는 입장으로,
보신으로 이루어진 부처님 즉, 보신불로는
아미타 부처님이나 약사여래 부처님 같은 분을 듭니다.
또 화신(化身)은 응신(應身)이라고도 하는데,
부처님이 구원할 대상에 따라 변화신을 나투어
지수화풍의 사대로 색신의 몸을 갖추어
천백억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부처님을 가리키며,
석가모니 부처님이 그 예입니다
하지만 근본으로 돌아 가서 보면
우리의 육안으로 볼수 있는 색신을 갖추신 부처님은
화신의 한분으로 마치 달이 허공에 있으매
물이 담긴 그릇마다 달 하나씩 비쳐 나듯
달은 달이로되 비쳐난 달로서는
진정한 달이라 할수 없는 것과 같이
색신으로 몸을 나툰 부처님을 뵙는 것으로
법신을 보았다 할수는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 병든 비구 박칼리가
돌아 가기 전에 부처님을 뵙는 것이 소원이라 하자
부처님은 그를 문병하시고 나서
부처의 육신을 보는 것이 부처를 본것이 아니라
법을 보는 것이 진정한 나를 본것이 된다고
설하시는 것을 보면
부처님의 불신관을 역력히 볼수 있습니다
그처럼 아무리 정교하고 거룩하게 모시고 꾸며 놓은들
모습으로 지어 진 부처님은 언젠가 다할 날이 있습니다
한데도 우리가 등상의 불상을 모시고 절함은
타 종교에서 말하는 우상으로서의 대상이 아닌
내 마음 속의 부처를 바라 보고 깨닫고자 하는
불교 신앙의 한 형태입니다
그러기네 우리는 법당의 불상을 예배함과 동시에
언제라도 자기 내면의 모습 없는 불상
즉 법과 진리를 마주 할수 있어야
진정으로 부처님을 예배 하였다 할것입니다
다시 부처님은 화신으로 나투시매
서른 두가지와 팔십가지의 거룩한 몸매를 갖추셨다고 합니다
하여 초기 경전인 수타니파타에서는
부처님의 감춰진 마음장상을 확인한 후에야
믿음을 일으키는 제자도 예로 보입니다
하지만 만약에 거룩하신 부처님의 훌륭한 몸매와 덕상을
숫자로 표현하고 세어 나가자면 서른 둘이나 팔십가지 뿐이겠습니까
아마 항하수가 다 마르고 수미산이 다 달아 없어 지도록
말한다 하더라도 다할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만약 경에 말해 지는 서른 두가지나 팔십가지의
거룩하고 훌륭한 모습을 갖춘 모습을 보고 부처라 한다면
그런 특징을 지닌 전륜성왕이라는 이도
부처라 하겠는가 하고 부처님이 물으시는 것입니다
겉에 나타난 훌륭한 모습이
그사람의 전부가 아닐수 있듯이
우리가 부처님을 친견하고 가르침을 배우는 바는
부처님의 마음이 되고
부처님의 행동을 하고
부처님의 말을 하도록
나 자신을 변화시켜 나가는데
진정한 의미가 있으며 그렇게 할때
진정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살아 계신 부처님을
몸소 짓고 친견하는 삶을 이룰수 있는 것입니다
짧고 간명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풀이 한다고
어렵고 복잡하게 하는 우를 범하니
오히려 가만 놓아 두니만 못하게 되었습니다
밝으신 눈으로 혜량하십시요
21. 非說所說分 第二十一
須菩提 汝勿謂如來作是念 我當有所說法 莫作是念 何以故 若人 言 如來 有所說法
수보리 여물위여래작시념 아당유소설법 막작시념 하이고 약인 언 여래 유소설법
卽爲謗佛 不能解我所說故 須菩提 說法者 無法可說 是名說法 爾時 慧命須菩提 白佛言
즉위방불 불능해아소설고 수보리 설법자 무법가설 시명설법 이시 혜명수보리 백불언
世尊 頗有衆生 於未來世 聞說是法 生信心不 佛言 須菩提 彼非衆生 非不衆生
세존 파유중생 어미래세 문설시법 생신심부 불언 수보리 피비중생 비불중생
何以故 須菩提 衆生衆生者 如來說非衆生 是名衆生
하이고 수보리 중생중생자 여래설비중생 시명중생
21. 설하나 설한바가 아님
부처님은 말하셨어요
수보리여,
그대는 여래가 내가 마땅히 법을 설한 바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 마십시요.
왜냐하면 만일 어떤 사람이
여래가 법을 설한 바 있다고 말하면
곧 부처를 비방하는 것이 되나니,
내가 설한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수보리여,
법을 설한다는 것은
그 이름이 설법일뿐
가히 설한 법이 없습니다.
그때에 혜명 수보리스님이 부처님께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어떤 중생이 다음 세상에 있어서
이같은 법을 설함을 듣고 믿는 마음을 내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 스님에게 이르시되,
수보리여,
저들은 중생이 아니며,
중생 아님도 아니니,
왜냐하면 수보리여,
중생, 중생하는 것은
중생이 아닌것을 여래가 중생이라 하는 것입니다.
*************
부처님은 사십구년동안 팔만의 장경을 설하시고도
나는 한 글자도 설한바 없다 하셧답니다
여기 이 단원에서도
부처님은 당신이 법을 설한다 하나
설할바 없는 법을 설하는 까닭에 설한다는 말이
오히려 부처를 욕되게 한다고 하시는군요
사실 우리가 아는 팔만 대장경은
우리 중생을 상대로 한 설법이라 할수 있지만
본시 부처님의 눈에는 중생이며 부처의 차별이 없으신 까닭에
바람 없는 바다에 물결이 일고
달빛이 물을 뚫고 비쳐도 흔들림 없으며
대그림자 뜰을 쓸어도 먼지 하나 이는 것이 없음입니다
하여 불가피하게 한생각 일으키어
천백억의 화신 가운데 정반왕궁에 나투시어
이룰바 없는 성도를 이루시고 설할바 없는 법을 설하시는
부처의 간절한 노파심과 대자비심을 생각한다면
수보리 존자의 눈물의 의미를 조금은 이해할듯 합니다
그러자 수보리 스님은 부처님의 말씀을 잘 이해 하면서도
짐짓 중생의 입장에서 어둑함을 이유로 한말씀 여쭈어 보는 것이
이처럼 심심미묘한 부처의 가르침을
중생들이 알아 들을수 있겠습니까 하시는군요
그러자 부처님은 알았다 하시는듯
수보리여 부처가 중생 중생 하지만
중생은 본디 없으며
본디 중생 아닌것을 일러 중생이라 한것입니다 하십니다
중생이니 부처니 보살이니 하는 것은
명상에 불과한 것으로 불가피하게 이름 하자니
그리 한것이니 이름에 속으면 안될 일입니다
만약 회사에 회장이니 사장이니
부장이니 과장 계장 평사원등의 이름이
일시적으로 붙여진 이름이듯 이름이 그 사람을
온전하게 나타내는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평등 속에 차별상이요
차별 속에 평등상이라
차별과 평등을 둘다 놓으면
차별이 평등입니다
앞의 단원에서
모든 상과 모습을 떠난것이 부처라 하니
상과 모양 없는 것이 진상이요
정한 바 상과 모양 없으므로
오히려 모든 상과 모양을 지을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일입니다
그리하여 세간에 나툰 두두물물 사사건건이
모두가 다 부처의 나툼이요 진여의 흐름입니다
중생이 없으면 부처라 할 한물건도 없습니다
부처가 없으매 부처가 설한 바가 없고
설한 바가 없으니 법이라 할 법도 없습니다
석가 부처님의 게송에
법본법무법 무법법역법 하신 말씀도
아마 그같은 뜻이라 생각됩니다
부처님이 설하신바 법이 없다 하심도
정하여 설하시지 않으시되 일체가 다 설하신 바요
일체가 다 설하신 바가 모든 법의 진실상인지라
느끼고 보고 깨달으면 천하가 그대로 장광설이요
다시 눈 부비고 보면 산하대지가 청정 법신입니다
저 지혜가 많다 하는 소동파가
마침내 무정설법의 설함 없는 설법 끝에
대오각성하는 것도 그것과 다를바 없을 것이고
관음 보살님을 찬탄한 게송에
관음보살무설설
남순동자 불문문 이라는 소식도
석가 노인의 가풍에 다름 아닙니다
저 지율 비구니의 침묵과 단식도
원효와 천명의 성자가 탄생되었다는
천성산의 수많은 생명의 소리소리들을
시방 법계에 전파하고 있음을 우리 불자들은
마음으로 몸으로 응원하고 격려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들 각자가 저마다 다 각각
이름 없는 부처이니 이름 값을 하고
저마다 생긴 모양대로의 꼴의 값을 한다면
그 아니 좋을 것입니까
부처님과 수보리 스님의 사제간의 지극한 공경과 사랑이
이에 이르르니 우담발화가 천지에 가득합니다
22. 無法可得分 第二十二
須菩提 白佛言 世尊 佛 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 爲無所得耶 佛言 如是如是
수보리 백불언 세존 불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위무소득야 불언 여시여시
須菩提 我於阿뇩多羅三먁三菩提 乃至無有少法可得 是名阿뇩多羅三먁三菩提
수보리 아어아뇩다라삼먁삼보리 내지무유소법가득 시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
22. 법을 얻을 것이 없음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아녹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신 것은
얻은 것이 없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그렇고 그러합니다.
수보리여,
내가 아녹다라삼먁삼보리에 있어서
조그마한 법도 얻은 것이 없으니
이것을 이름하여 아녹다라삼먁삼보리라 하느니라.
********************
여기서는 이 경의 시작 부분이 되는 곳을
한번 살펴 볼 일입니다
그래야 이해가 쉬울듯 해서입니다
선남자 선녀인 발 아녹다라삼먁삼보리심자
운하응주 운하항복기심 이라고 수보리 스님이
물으신것에 대한 답변과 그에 따른 질문등이
금강경의 대강입니다
그러면 아녹다라삼먁삼보리란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한자로 풀이 하면 무상정등정각이라 표기 되며
우리 말로 풀이 하면 위 없는 깨달음이라는 뜻이 됩니다
위 없는 깨달음을 얻고자 마음을 내어
마침내 그 뜻을 이룬다면 영원한 행복을 성취한 바가 되어
앞의 설명과 풀이에서는 종종 영원한 행복이라는
용어가 등장하였을 것입니다
제3단원인 대승 정종분에서
부처님은 수보리 스님의 질문에 대하여
이렇게 답변하고 계심을 상기해 보십시요
무상정등정각 즉 위 없는 깨달음,
고쳐 말하여 영원한 행복을 얻고자 하는 이들은
사생구류의 종류라 불리는 일체 중생들을
남음이 없는 열반에 들게 하되 단 한중생도
열반에 든 중생이 없어야 합니다 라고 하시며
왜 그러냐 하면 나라든가 상대라든가등의
네가지 관념적인 생각이 없으므로 해서
내가 너를 이라는 등식이 성립 되지 않는
끊임 없고 쉬지 않는 보살행을 강조하심을 살펴 보았습니다
무상정등정각을 얻고자 마음을 낸 이들은
경전을 공부하거나 좌선을 하거나 주력을 하거나
염불 정진을 하여 삼매에 들라든지 하는
공부의 방법을 설하시는 것이 아니라
일체 중생을 무여열반으로 들게 하는 보살행을 통해
진정한 삶 속에서의 수행 즉
삶이 수행이요 수행이 삶과 다르지 않은
일여의 행을 하라 권하시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일체 중생이 제도 되어야 비로소 내가 제도 되고
내가 일체 중생들을 위한 보살행을 실천함으로 해서
일체 중생과 둘이 아닌 차별 없고 둘이 아닌 하나가
될수 있기 때문입니다
금강경에서 말하여 지는 대승의 보살행은 아마도
당시의 사람들을 위한 가르침이라기보다
지금 이 혼돈의 시대를 살아 가는 우리들에게
꼭 알맞는 가르침을 설하신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길지도 않은 인생의 여로에서
언제 틀고 앉아 좌선하며 일체 중생을 제도 하고
염불 간경의 수행을 완성한 후에 중생 제도를 하겠는가
중생 제도가 좌선인 동시에 간경염불 수행이
동시에 이루어 져야 한다는 부처님의 메시지라 생각 됩니다
하여 수행은 산중이나 절집의 강원과 선원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사는 저잣 거리의 이서방과 박서방의 치고 받는
걸죽한 한판 시비 속에서도 공부인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며
한결같은 보살행을 실천해 나가면 이것이 진정한
무상정등정각이요 위 없는 영원한 행복의 길일 것입니다
부처님이 얻으셨다는 아녹다라삼먁삼보리도
다겁생을 두고 일체 중생을 위한 희생과 봉사
보살행의 결과물이라 보면 거기에는
얻고 잃을 바 없는 진솔한 삶의 애환 자체가
그대로 아녹다라삼먁삼보리의 길이 됩니다
만약 거기에 얻었다 생각한다면
얻은 나에 걸리고 언은 물건에 걸리며
걸린다는 마음에 다시 걸리니
어찌 진정한 무아봉공 사신구법의 행이 이루어 지겠습니까
하여 한 법도 얻은 바 없음을 일러서
진정으로 위 없는 깨달음을 얻었다 할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지나치게 관념화된 깨달음
희화화 된 깨달음 속에 함몰 되어
불자들이 <<<무엇을 어떻게>>>라는
방법론을 잃고 헤매는 모습을 봅니다
이러 한때에 진정으로 부처님의 근본적인 가르침에 근거한
실천적인 불고 생활 속의 불교 운동에 대한
진정한 반문이 있어야 우리 불교의 미래가 있습니다
저 원효 대사가 일체 중생을 위한 보살행으로
천촌만락을 누비면서 외치셨다는
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의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 갑니다
23. 淨心行善分 第二十三
復次須菩提 是法 平等 無有高下 是名阿뇩多羅三먁三菩提
부차수보리 시법 평등 무유고하 시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
以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 修一切善法 卽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
이무아무인무중생무수자 수일체선법 즉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須菩提 所言善法者 如來說卽非善法 是名善法
수보리 소언선법자 여래설즉비선법 시명선법
23. 맑은 마음으로 선을 행함
부처님은 다시 이렇게 말씀 하셨어요
또 수보리여,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어서
이름이 아녹다라삼먁삼보리라 합니다.
나도 없고
남도 없고,
중생도 없고,
오래 산다는 것도 없는 마음으로
일체의 선법을 닦으면 곧 아녹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됩니다
.
하지만 수보리여,
선법이라 하는 것도
여래가 선법이라 할수 없는 것을 선법이라 한 것입니다.
*********
위 없는 바른 깨달음을
아녹다라삼먁삼보리라 하는데
이 위 없는 바른 깨달음에 있어서는
일체가 평등하며 높고 낮음이 없다 하시네요
달마 대사가 양무제와 만나서
불법의 핵심에는 무엇이 있는가 하는 물음에
텅 비고 비어서 성스러움조차도 없다
하는 답을 생각케 합니다
결국 무상이라는 뜻이
다른 모든것들의 위라는 뜻이 아닌
일체 평등의 무차별 경계이니
거기에 나라거나 남이라거나 하는
네가지 관념의 상이 끊어 진 자리에 바로 서서
선한 법을 실천하는 것이 무상정등정각을 이룸이라
다시 한번 강조하시는 부처님이십니다
선한 법이라는 것도 선에 상대된 악이 있으면
진정한 선이라 할수 없는 법
상대와 차별을 떠나 일체 선법이 되는
육도만행의 바라밀행을 실천하는 것이
진정한 깨침의 길이라 하시는 것입니다
서산 스님이 지은 시를 한편 소개해 보렵니다
일념선심생 불좌마왕전
일념악심생 마왕거불전
선악양상망 마불하처현
...이하 략...
한생각 착한 마음이 들면 부처가 마왕의 자리를 차지하고
한생각 악한 마음이 일면 마왕이 부처의 자리에 앉네
선도 악도 둘다 잊으면 마왕이며 부처가 어디에 나투랴
부처나 선함이 마군이나 악함을 상대로 한 것이라면
진불이나 진선이라 할수 없습니다
진불이나 진선의 모습은 선악양상망한 자리에서 나오는
부처도 착함도 잊은 자리입니다
생각 생각 걸음 걸음 육도만행을 실천하되
오직 무심으로 행하는 실천만 있을 뿐
거기에 나라거나 상대라거나
남의 잘잘못을 따지거나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등의 마음의 찌꺼기가 남으면
오히려 업만 두터이 하는 것입니다
바라밀행은 그렇게 마음에 머무름이 없이 행하는 것으로
경문에 일러 <<응무소주이생기심>>하라 하는 것이지요
지금이나 전에도 마찬가지지만
우리 나라는 큰 병통에 빠져 있는 일이 있습니다
들어 서는 정권들마다 구호를 남발하는 것들중에
제이의 건국이라느니 역사를 바로 세운다느니 하는
인위와 억지의 말놀음들이 그것입니다
그런 일들은 우리 이 단원에서 살펴 보듯이
지금
여기
이자리
이 시간에
선법을 실천하되 바라밀행으로 실천하면
자연스럽게 성취되고 이루어 지는 당연한 결과물인데
억지로 선의 편을 가르니
상대인 악이 생기고
악이라는 상대는 자신들만이 선이라 주장하기에
서로 다투는 중생의 심리만 만연하며
이같은 대립과 투쟁이 건국 이래의 우리 역사의
큰 물줄기를 이루어 오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심 불가득의 차원에서
지금 현재의 역할과 방향을 바르고 선한 법의 실천에 둔다면
모든 것은 제자리를 찾아 돌아 가게 되는 것인데
어둑한 인사들의 말 몇마디가 세간을 온통
불난 집과 같이 만들고 있으니
어렵고 험한 세상의 흐름 속에 갈 길 몰라 방황하는 것은
이땅에 백성들과 민초들 뿐입니다
기존의 법들이 모두 필요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이니
그 운용을 잘하고 못하고를 따져 고쳐 나가는 것이 바른 일인데
새 법을 만들고 새 강령을 제창하는 일로 날이 새고 있으니
안정과 평화를 구하기는 요원한 일입니다
이유는 단 하나 각종 법이
생명과 백성과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입안 되고 제정되는 것이 아닌
붕당과 파당의 이해와 득실에 기초하여
만들어 지는데 기인합니다
모두들 초심으로 돌아가 부처의 지혜를 구하고
금강 반야의 바라밀법 공부들을
남의 웃 자리에 서려는 사람들에게 철저히 교육 시켜
대승 보살행의 실천장이 되도록
하여야 할듯 합니다
선의 편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보이는 것은 내편 아니면 악의 편입니다
그런데 선의 입장을 놓고 보면
악도 없고 남의 편도 없으니
마치 바둑에 잇어서나 경기에 있어서
훈수꾼이나 객관적인 입장의 관전자 같아서
한바탕 벌어 지는 대국이나 경기를 제대로 즐길수 있게 됩니다
선한 법이 없음에도
선한 법이라 일러 설하실수 밖에 없는 부처님
얻을 바 위없는 깨달음이 없음에도
위 없는 깨달음이라 말씀 하실수 밖에 없는 부처님
참으로 감사하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자칫 한마디만 잘 못 이해 하여도
십만팔천리는 달아나 버리는 중생을 위한
그같은 노바심절한 가르침이 금강경에서 말해지는
<<<선부촉제보살 선호념제보살>>>의 마음입니다
24. 福智無比分 第二十四
須菩提 若三千大千世界中 所有諸須彌山王 如是等七寶聚 有人 持用布施
수보리 약삼전대천세계중 소유제수미산왕 여시등칠보취 유인 지용보시
若人 以此般若波羅蜜經 乃至四句偈等 受持讀誦 爲他人說 於前福德
약인 이차반야바라밀경 내지사구게등 수지독송 위타인설 어전복전
百分不及一 百千萬億分 乃至算數譬喩 所不能及
백분불급일 백천만억분 내지산수비유 소불능급
24. 복과 지혜를 비교할 수 없음
부처님이 말씀 하셨어요
수보리여,
만일 삼천대천세계 중에 있는
수미산 만큼 많은 칠보로 어떤 사람이 보시할지라도,
만일 다른 사람이 이 금강반야바라밀경의 사구게를
수지하고 독송하며 남을 위해 설해 준다면
앞의 복덕으로 는 그 백분의 일도 미치지 못할 것이며,
백천만억분 내지 그 어떠한 숫자의 비유로도
능히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
앞의 23분에서는
맑은 마음으로 선행을 행하되
그 선행이라 하는 것도
선행이 아닌 것을 선행이라 한다 하였습니다
그처럼 선행을 행하되
바라밀법이라는 방식의 선행이 되면
그는 이 금강경의 가르침이나 아니면
간단한 네구절의 가르침을 온전히 실천 수행함과 같아서
그로 인한 복덕과 지혜가 대단히 크고 많음을 말하시고자
사바 세계의 거대한 수미산을 예로 하여
그 수미산만한 보배들로 보시를 하는 공덕보다
비교할수도 없을 만큼 크다 하시네요
여기서 크다 하는 것도 사실은
크다 할것이 없는 것을 크다 한 것이니
왜냐 하면 이루 헤아릴수 있는 정도의 복덕의 크기가 아님이요
다시 사구게를 수지 독송하고 전하여 주는 사람들은
거기서 얻어 지는 복덕에 전혀
탐착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기에
크다 작다는 무의미한 일입니다
언젠가 어느 스님이 절에 불사를 하는데
다소간에 많고 적은 액수를 시주 받아서 불사를 다 이루고는
법호 날 그중에 제일 큰 액수를 시주한 이의 이름은 빼고
한사람 한사람 소개 인사를 시켰더랍니다
그러자 거액을 시주한 보살은 법회 내내
못마땅한 표정으로 있더니 법회가 마쳐 지자
인사도 없이 가 버리더랍니다
후일에도 여전히 행동과 대하는 태도가
전 같지 않음을 보고는
스님이 불러서 이렇게 말하였답니다
보살님은 내가 이름 석자 호명하지 않은 것이 서운한가본데
이름 석자 호명하므로 해서 그 지은 복을 다 까먹는 것이 낫소
아니면 이름 석자 감추고라도 많은 복을 지음이 좋소
만약 이 말을 듣고도 여전히 같은 생각이라면
보살이 시주한 돈을 내가 당장 돌려 드릴테니
가져 가십시요 하였더랍니다
물론 그 보살님은 마음을 되 돌렸구요
사실 그런 경우 이름을 밝히면
참 훌륭하다 하다 하고 박수 치는 이가 반이면
반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시기와 질곡의 마음이 일기 쉬운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무슨 불사에 동참을 하면
이름 석자를 쓰거나 돌에 새겨서라도
어딘가에 표를 남기고자 합니다만
바른 눈으로 본다면 참으로 못할 일이 그것입니다
그같은 생각 일기 전에
어서 빨리 금강경 독송 한편 하시고
가까운대로 이웃의 도반들 불러서
보시바라밀 행할 장소와 시간 정하여
복 없는 복 지으러 다녀들 오십시요
25. 化無所化分 第二十五
須菩提 於意云何 汝等 勿謂如來作是念 我當度衆生 須菩提 莫作是念
수보리 어의운하 여등 물위여래작시념 아당도중생 수보리 막작시념
何以故 實無有衆生 如來度者 若有衆生 如來度者 如來 卽有我人衆生壽者
하이고 실무유중생 여래도자 약유중생 여래도자 여래 즉유아인중생수자
須菩提 如來說有我者 卽非有我 而凡夫之人 以爲有我
수보리 여래설유아자 즉비유아 이범부지인 이위유아
須菩提 凡夫者 如來說卽非凡夫 是名凡夫
수보리 범부자 여래설즉비범부 시명범부
25. 교화하되 교화함이 없음
부처님이 말씀 하시기를
수보리여,
또 그대들은 여래가
내 마땅히 중생을 제도 했다라고 생각한다
말하지 마십시요.
수보리여,
그런 생각을 갖지 말아야 하니
왜냐하면 진실로 어떤 중생이라도
여래가 제도한 바가 없습니다.
여래가 제도한 중생이 있다면
여래는 곧 아, 인, 중생, 수자의 상이 있는 것이 됩니다.
수보리여,
여래가 내가 있다고 말하는 것도
곧 내가 있음이 아닌데,
범부들이 내가 있다고 집착하는 것입니다.
수보리여,
범부라는 것도 그 이름이 범부일 뿐
여래가 설한 바 범부가 아닙니다
***************
교화하는 부처와 교화 받는 중생은
마치 몽환포영이라
있는 듯 없고
없는가 하면 나투니
천만 변화가 다 이 안에 있습니다
하지만 근본에 들어 가 보면
언제 한생각 일으켜 중생을 제도하리라 하셨을 것이며
언제 한생각 일으켜 중생 중생 하셨으리까
한생각 일으킬때 그때가 바로 중생심이요
한생각 일어날때 바로 돌이키면 정각을 이룹니다
수불리파요 파불리수라
한바탕 부처와 중생 여래와 범부가
마치 하나의 끈에 있어서 그 양끝과 같기에
어느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도 세울수 없는
상의 상존 관계 속의 교화요 제도입니다
하기에 타인을 제도함은 자신을 제도함이요
자신을 제도 하는 것이 일체 중생을 제도 함이니
일체 중생을 무여열반으로 인도하였다 하여도
자신을 인도한 바와 다르지 않나니
제 잘난 마음이 일어 날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본체의 움직임에 따라
변화 되어 나타나는 그림자 같습니다
이에 이르러
교화함도 없기에 교화 받음도 없고
중생이 없기에 부처도 없으며
범부가 없으므로 여래도 없습니다
반야심경에서도
무안이비설신의에서
무지역무득에 이르는
무의 향연과 같다 할것입니다
부처님이라 할지라도
나와 상대 중생과 수자상이라는
네가지 상의 관념이 없어야 하며
그 속에서 일어 나는 교화나 제도라는것은
교화와 제도가 아니라는 가르침을 거듭 만나게 됩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 말해 보면
기도에 동참하는 불자들이 제일 관심을 갖고
귀 기울이는 시간이 언제인지 아시나요?
다 그런바는 아니라도 아마
가족들의 축원을 하는 시간입니다
내 가족이나 내 이름은 언제 나오나 귀 기울이고 있다가
스님이 축원을 하시면 가만히 있다가 일어 나서
절을 한다든지 합니다만
만약 축원이 다 마쳐 지도록 가족의 이름이 나오지 않으면
법회를 다 마치고는 스님 우리 축원은 왜 안하십니까 하고
따지듯 묻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그도 아니면 어느 경우에는
자신이 과일을 사다 불단에 올렸는데
다음 사람이 와서 자신의 공양물을 올리면서
자신이 올린 것을 옮기거나 가에로 놓아 둔다든지 하면
한마디 하거나 아니면 다시 자신의 공양물을
원 자리에 가져다 놓기도 합니다
자칫 공양 올리고 축원하러 와서
마음 상해 돌아 가서는 불전에 인연을 끊기도 하니
이 무슨 일이란 말인가요
그것이 모두가 다
내것, 내 가족의 축원
내가 올린 공양물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저지르게 되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전형입니다
이미 공양 올렸으면 나의 것이 아니니
더 이상의 마음을 쉬면 좋을 일이고
스님의 입을 통해 축원이 나오지 아니 하더라도
그저 기도하고 축원하는 마음으로 동참한 모든 이의
행복과 건강을 빌수는 없는 것일까요
내가 사온 초를 꽂아야 하고
내가 사온 향을 피워 올려야 하고
부처님 전에 공양물을 불공이 마쳐 지면
나는 과일 하나 꼭 가져다 우리 가족 먹여야
건강하고 행복할까요
탐심과 치심과 진심을 버리고 비우러 와서
오히려 업장만 두텁게 하고 돌아가는 불자들을 보면
측은한 마음과 딱한 생각이 적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누구 누구라는 친소가 없는 분이요
갠지스 강의 모래 수만큼 많은 수의 국토가 있고
그 많은 국토의 갠지스강의 모래를
모두 합한 수만큼의 중생들의 마음이라도
다 알고 다 보신다는 가르침을 상기해 볼 것입니다
사실 그렇게 나만 알고 챙기는 이들을 바라 보는 나도
마음에 그런 마음이 있기에 그런 모습이 눈에 들어 오는 것이니
그런 모습을 볼때마다 얼른 내 마음을 닦을 일입니다
닦고 비우고 덜어 내고 마침내 비운다는 생각조차 비워
머무는 바 없는 마음 내어 살도록 쉼이 없이 정진하십시다
마침 오늘이 사이버라는 무한의 세계에
원효사 카페라는 이름으로 정법의 당간을 세운지
어언 이년여의 시간이 지난 날입니다
위로는 부처님과 사중은에 보답하지 못함이 부끄럽고
아래로는 일체 중생을 위한 정법 도량 되지 못함 부끄러우며
스스로는 부족한 모습 챙겨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서
님들의 귀와 눈을 어지럽혔으니 그도 부끄러울 뿐입니다
원하는 바는
무변허공을 법의 당우로 삼고
일체 중생을 수행하는 눈 푸른 납자로 하여
풀벌레 울음 소리와
산들 바람의 흔들리는 미풍 소리를
팔만 사천의 법음으로 삼아
다함 없는 법석 열어
무공저를 힘껏 불어 무생곡을 연주하며
무저선에 올라 앉아 무생가를 부르는 것
동참 대중 모든 이들
원이차공덕으로
자타일시성불도 하여 지이다
26. 法身非相分 第二十六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三十二相 觀如來不 須菩提言 如是如是 以三十二相 觀如來
수보리 어의운하 가이삼십이상 관여래부 수보리언 여시여시 이삼십이상 관여래
佛言 須菩提 若以三十二相 觀如來者 轉輪聖王 卽時如來 須菩提 白佛言 世尊
불언 수보리 약이삼십이상 관여래자 전륜성왕 즉시여래 수보리 백불언 세존
如我解佛所說義 不應以三十二相 觀如來 爾時 世尊 而說偈言
여아해불소설의 불응이삼십이상 관여래 이시 세존 이설게언
若以色見我 약이색견아
以音聲求我 이음성구아
是人行邪道 시인행사도
不能見如來 불능견여래
26. 법신은 상이 아님
부처님이 말하셨어요
수보리여
그대 생각에 어떠 합니까?
가히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겠습니까?
수보리 스님은 부처님께 여쭈기를,
그렇습니다.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나이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수보리여,
만일 삼십 이상으로써 여래를 본다면
전륜성왕도 여래라 할 것입니다.
그러자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의 설하신 뜻을 생각해 보니
응당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없나이다.
그때에 세존께서 게송으로 설하시되,
만일 모습으로써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하려 하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함이라.
능히 여래를 보지 못 합니다
*************
부처님은 이제 다시 한번
수보리 스님에게 물으시어 당신의 뜻을 확실히 하시고자
하시는군요
그것은 부처라고 하는 것은
몸의 어떤 특징이나 특별한 모습이 있어서
구별하거나 알아 볼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부처에게 있다는
서른 두가지와 여든 가지의 특별한 몸매를 보면
부처를 보았다 할수 있겠는가요 하고 물으십니다
수보리 존자는 얼른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하시는군요
평소의 수보리 스님과는 달리
여기서는 그렇지 않다 라고 답해야 할터인데
왜 그러시는 걸까요
아마 중생들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답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그렇다고 대답하신 듯 합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수보리 스님의 마음을 아시고
마음 속으로는 빙그레 미소 지으시면서도
이렇게 말하시지요
그럼 전륜성왕이라는 왕에게도
그런 삼십이상 팔십종호가 있다 하는데
그럼 그도 부처라 하겠는가 하고요
이때에 수보리 스님이 말씀 드리는 것을 유심히 보십시요
보통은 아차 제가 잘못 말하였습니다
실은 삼십이상으로 부처를 볼수 없습니다 라고
일반적으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정정하려 할것입니다
그런데 수보리 스님은
<<제가 부처님의 설하신 바를 이해 하기에는>>이라는
용어를 쓰시는군요
어디까지나 자신의 견해나 깨우침이 아닌
부처님의 가르침을 앞세워 자신은 쏙 빠지는 무아상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경의 시작에도 아난 스님이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라고 하시는 것도
부처님은 틀림 없이 말하셨는데
내가 들어 알고 기억하는 바만 말하는 것이어서
혹여라도 내가 잘못 기억하거나 잘 못 들었을 경우에
그 모든것의 책임이랄까 하는 것은
모두 나에게 있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합니다
만약 부처님이 이와 같이 설하셨다 라고 하는 것과는
여러 가지로 다른 뉘앙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나에게> 라는 말에도 나는 없는 나입니다
그저 들었을 뿐이고 아니 들려 왔을 뿐이라는 말이
더 정확할것 같고요 들은대로 말한다 하는 것이니
거기에는 들은 사람도 말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니 부처님은 더 이상 말하지 않으시고
금강경의 사구게로 알려진 다음의 게송을 일러
당신의 뜻을 설하십니다
만약에 누가 있어서
모습을 가진 존재로서의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을 가진 존재로서의 부처를 구하려 하면
이 사람은 잘못된 길을 행함이니
능히 나를 바로 보지 못합니다
우리 불교에도 비슷한 일화가 적지 않으나
서양에도 예수의 모습과 관련한 이야기가 있더군요
어느 화가가 예수상을 사실적으로 그려 보고자
사방을 다니면서 예수에 근사한 모델을 찾습니다
마침내 이 사람이다 싶은 사람을 만나
예수의 성상을 그려 놓으니 모두들 정말
예수가 살아 온듯한 마음으로 찬탄합니다
한 삼십년 지나서 사탄의 모습을 그려 달라는 청탁을 받고
모델이 될만한 사람을 찾아 나서서 한사람을 보고
모델로 하여 그림을 그립니다
그림이 완성되자 모델이었던 사람이 슬피 흐느껴 웁니다
작가가 어리둥절하자
삼십여년전 나는 어느 화가의 모델로
예수가 되었던 적이 있는데
오늘은 정 반대의 사탄의 입장이 되었음을 슬퍼 한다 합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게 예수와 사탄은 동일 인물이고
그린 화가도 동일한 화가였던 것입니다
그처럼 모습은 성과 속을 넘나들고
마음은 천당과 지옥을 들고 나며
말은 부처와 마군의 말을 같이 냅니다
하기에 깨치지 못하고 하는 부처님의 장광설은
마군이의 말과 같다 하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능엄경에서 설하시는 마군의 이야기로
공부인에게 불보살의 형상으로 나타 나서
부처될 마정 수기를 준다 하여도
마음이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하시는가 봅니다
공부를 조금 하다 보면 천만경계가 다 나타나고
자칫 자신에 속아 부처를 운운하고 신통과 위세를 부리다
영영 공부의 길에서 멀어 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니 속지 말고 속지 말 일입니다
27. 無斷無滅分 第 二十七
須菩提 汝若作是念 如來 不以具足相故 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 須菩提
수보리 여약작시념 여래 불이구족상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수보리
莫作是念 如來 不以具足相故 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 須菩提 汝若作是念
막작시념 여래 불이구족상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수보리 여약작시념
發阿뇩多羅三먁三菩提心者 說諸法斷滅 莫作是念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 설제법단멸 막작시념
何以故 發阿뇩多羅三먁三菩提心者 於法 不說斷滅相
하이고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 어법 불설단멸상
27. 끊어짐도 사라짐도 없음
부처님이 다시 이렇게 물으셨어요
수보리여,
그대는 여래가 구족한 몸매를 갖추지 않았기에
아녹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런 생각을 하지 마십시요
여래가 구족한 몸매를 갖추지 않았기에
아녹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하지 마십시요.
수보리야,
그대가 만일
아녹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킨 이는
모든 법에 단멸의 상이 있다고 설한다고 생각하면
,
이러한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하니
왜냐하면 아녹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발한 이는
법에 있어서 단멸의 상이 있다고 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26 단원에 우리는
부처님이 설하시는 사구게송에서
모습으로 나를 보려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지 말라 하신 가르침을
살펴 보았습니다
부처님이 그렇게 설하시는 것을 보고
우리 미욱한 이들이 생각하기 쉬운 것은
그럼 부처님은 모습이 없으신 것인가
현재 우리 앞의 부처님의 몸은 무엇인가 등등의
의문이 생기면서
중생들이 갖기 쉬운 단견이나 상견의 이변에
떨어 지기가 쉽습니다
금강경 오가해를 풀이한 함허 스님은
使之出斷常坑하여 登眞實際하며
敷萬行花하여 成一乘果케하시니
반야는
단견, 상견의 구덩이에서 뛰어나서
진여자성의 실상 자리에 올랐으며
만 가지 행의 꽃을 피워서
일승과를 이루게 하시니 라고
설의와 해설을 붙인 곳이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이 몸이 죽으면 그만이지 무엇이 있나?
아무것도 없다. 살아 생전에 잘 살고 보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단견(斷見)입니다.
또 반대로
“그렇지 않아,
이 몸은 죽어도 항상 있어” 라고 생각함은
이것은 상견(常見)이지요.
없다고 하는 단견과 항상 있다고 하는 상견의
두 가지 견해가 달라서 서로 반대의 입장에 섭니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의 몸에 대하여
부처님의 몸은 없다 라고 단정 짓는 것은 단견이라 할것이고
부처님은 영원하다 라고 하는 것은 상견입니다
앞의 단원을 잘 못 이해하면 단견에 빠져서
부처는 모습으로 볼수 없다는데
부처가 무슨 필요가 있으며
절에 가서 불상에 절은 왜 하는가 등의 생각이
들수도 있음이요
모든게 마음이라는데 마음으로 절하고
마음으로 기도하지 하는 생각도 들기 쉽습니다
만약 이러한 경우라면
밥 먹는 것도 마음으로 먹으면 배가 부를 것이며
스스로 나는 부처다 라는 마음을 먹는다고
부처가 되거나 부처처럼 공양 받을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부처님은 다시 중생의 병통을 고치시고자
모습으로 나를 볼수 없다고 하셨다 해서
부처는 특정적인 모습이 아니다 라는 견해나
서른두가지 또는 여든가지의 거룩한 덕상이
부처가 아니다라고도 단정짓지 말라 하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어는 한 생각의 관념을 마음에 심어 두고
그 입장에 맞추어 기다 아니다를 판단하기로 하면
자칫 실제 부처님이 우리 앞에 현신해 오셔도
우리는 그냥 지나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위 없이 바른 깨달음을 얻은 이 즉 부처와 정각자라면
모든 법에 있어서 허망하다는지 단멸된다는지 하는
가르침을 설하지 않으신다 하는 것입니다
어느 선지식이라 알려진 스님은
법당에 부처님을 향해 소피를 보았답니다
대중들이 스님이 어찌 거룩한 부처님에게 라고
한마디씩 무어라 하니
부처의 몸에 법계에 충만하다 하는데
그대들이 부처 없는 곳을 일러 주면
내 거기다 소피를 보겠다 하였답니다
혹여 공부의 경계에서 그런 경우가 있을수는 있을지라도
자칫 그 스님을 따라 무애행을 한다 하다가는
볼기 맞기 꼭 알맞은 짓이고
업을 쌓기 쉬운 일입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 보면
초심 불자들이 혼동하거나 의문을 갖기 쉬운 경우가
부처님 전의 절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어느 스님은 삼천배를 해야 만나 준다거나
어느 스님은 일배만 하여도 진중하고 온 마음을 다하면
삼천배에 다름 아니다 하고 가르치기도 하고
누구는 참선이 제일이다
누구는 염불선이 제일 좋다 든지 하는 가르침에
선택의 기로에 서서 당황하기 쉽습니다
초심 불자들은
두 경우를 말하시는 스님들 가르침중
어느 쪽을 믿어야 할지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 어려울 때가 있게 됩니다
이 때에 우리 부처님의 가르침은
단견과 상견의 두 견해에 떨어 지지 말고
중도의 반야 사상을 가르치십니다
부처님은 이러한 경우에
의법 불의인이라 하신 경우가 있으니
법에 의지하고 자신에 의지하는 관점에서 스스로의 입장을
정립해 나가는 것이 필요 합니다
깨달음의 마음을 낸 수행자들은
어느 한편에 치우친 견해를 갖지 말라 하시니
자칫 선악 호오 시비의 문제에 있어서
입장을 나타 내지 말라는 말로 들릴지 모르나
이는 오직 정법을 근거로 하여 법에 의지한 입장과
태도를 취하라는 말이라 이해 하십시요
단견과 상견 두 견해에 어느 곳에 빠지지 않고
다시 두 견해를 등짐도 없이
둘다 아우르면서 일승의 과를 성취코자 하면
어찌 해야 할까요
같이 생각해 보십시다
28. 不受不貪分 第二十八
須菩提 若菩薩 以滿恒河沙等世界七寶 持用布施 若復有人 知一切法無我
수보리 약보살 이만항하사등세계칠보 지용보시 약부유인 지일체법무아
得成於忍 此菩薩 勝前菩薩 所得功德 何以故 須菩提 以諸菩薩 不受福德故
득성어인 차보살 승전보살 소득공덕 하이고 수보리 이제보살 불수복덕고
須菩提 白佛言 世尊 云何菩薩 不受福德 須菩提 菩薩 所作福德 不應貪着
수보리 백불언 세존 운하보살 불수복덕 수보리 보살 소작복덕 불응탐착
是故 說不受福德
시고 설불수복덕
28. 받지도 탐하지도 아니함
부처님은 수보리 스님에게 이렇게 설하셨어요
수보리여
만일 보살이
갠지스강의 모래수 만큼 많은 세계를
칠보를 가득 채워 보시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있어
일체법 가운데에
참나가 없음을 깨달아 수행을 성취하면
이 보살이 얻는 공덕이
앞의 보살의 얻는 공덕보다 많습니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모든 보살은 복덕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수보리 스님은 부처님께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보살이 복덕을 받지 않는다 하십니까?
하고 여쭈어 보자
부처님은
수보리여,
보살은 자신이 지은 복덕에 집착하지 않기에
복덕을 받지 않는다 하는 것입니다.
*****************
이번 가르침은 보살이나
진정한 수행자들이 무한의 복덕을 짓되
복덕에 집착하거나 받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므로
오히려 더욱 커지는 이치를 밝히시는 대목입니다
게다가 무한의 복덕을 지음에 있어서도
갠지스 강의 모래 수만큼의 세계에 칠보를 가득 채워
보시하는 공덕이 대단히 클 것임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크다 할수 있는 공덕은
모든 법에 있어서 무아의 법을 체득함이
더욱 크다고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이 무아의 법인을 성취 한 이가
부처요 깨달은 정각자라
무한의 복전을 이룩하신 것이니
혹여라도 칠보로 짓는 공덕이 크다 하지만
둘을 서로 비교하고 논하자면 비할수 없습니다
이 무아의 법인을 성취하는 이는
이미 나가 없으니 복을 받을 이가 없음은 물론
지은 바 복덕에 내것이라는 탐착심이 없어서
일체 중생이면 누구라도 무한정으로 가져다 쓰도록 하니
진정으로 다함 없는 무루복을
짓는 일이 된다 하시는 것입니다
언젠가 부처님은 자신을 향해 무지막지한 욕을 하는 이에게
이렇게 말하신 적이 있습니다
여보시요 만약 누가 당신에게 선물을 가져 올경우
당신이 받지 않으면 어떻게 하던가요
그럼 그 선물을 내가 도로 가져 가지요 합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그처럼 당신은 나에게 욕을 한 없이 하더라도
나는 내가 욕을 듣는다 생각을 하지 아니하고
받지도 아니 하니
그 욕은
당신이 도로 가져 가야 할것입니다
하셨습니다
그와 같이 부처님이나 정각자 그리고
아녹다라삼먁삼보리를 향한 마음을 낸 이들은
이와 같이 공덕을 짓고 이와 같이 마음을 쓰기에
한량 없는 공덕을 짓고도 오히려
일체 중생에게 회향할수 있게 됩니다
하여 진정한 수행자들은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느 때인가 눈이 먼 제자 아니룻다가
옷을 꿰매려 바늘에 실을 꿰려다 못 꿰자
누구 복 지으려는 이는
내 바늘 귀를 꿰어 주겠는가 하고 말하였답니다
그러자 옆에서 얼른 바늘귀를 꿰어 주는 손길이 있어서
감사하게 인사하니 그가 바로 부처님이시더랍니다
아니룻다는 아니 인천의 스승이시고 복전이신 부처님이
어찌 이런 일로 복을 지으십니까 하니
부처님은 복을 짓는 이 중에서 나보다 더한 이는 없다
왜냐 하면 나는 일체 중생을 위하여 복을 짓는 것이니라
하셨답니다
<<<원문 인용>>>
["아니룻다, 이 세상에서 복을 지으려는 사람 중에
나보다 더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여섯가지 법에 만족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여섯 가지 법이란,
보시와 교훈과 인욕과 설법과 중생 제도와
더 없는 바른 도를 구함이다"
아니룻다는 말했다.
"여래의 몸은 진실한 법의 몸이신데
다시 더 무슨 법을 구하려 하십니까?
여래께서는 이미 생사의 바다를 건너셨는데
더 지어야 할 복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다, 아니룻다. 네 말과 같다.
중생들이 악의 근본인 몸과 말과 생각의 행을 참으로 안다면
결코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중생들은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나쁜 길에 떨어진다.
나는 그들을 위해 복을 지어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힘 중에서도
복의 힘이 가장 으뜸이니,
그 복의 힘으로 불도를 성취한다.
그러므로 아니룻다,
너도 이 여섯 가지 법을 얻도록 하여라.
비구들은 이와 같이 공부해야 한다."]
그처럼 우리 불교와 불교인들 수행자들은
무한히 복덕을 짓는 공덕행을 쉼 없이 실천하면서도
그 복덕에 집착하거나 탐욕을 부리지 아니하고
부처님처럼 일체 중생을 위하여
회향하는 마음이 요구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느 곳 하나 부족함이 없는데
불자들이 가르침을 실천하는 정도가 부족하기에
늘 마음 한켠에 허전함을 느끼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이글을 읽으시는 우리 불자님들은
복과 지혜를 짓고 마음 닦고 수행하는 도량이
지금 여기 현재 처해 있는 곳임을 생각하시고
쉼 없이 정진하여 가시자고 거듭 말씀 드립니다
29. 威儀寂靜分 第二十九
須菩提 若有人 言 如來 若來若去 若坐若臥 是人 不解我所說義
수보리 약유인 언 여래 약래약거 약좌약와 시인 불해아소설의
何以故 如來者 無所從來 亦無所去 故名如來
하이고 여래자 무소종래 역무소거 고명여래
29. 거동이 고요함
부처님은 이렇게 수보리 스님에게 설하셨습니다
수보리여
만일 어떤 사람이 있어서
여래가 오고 가며 앉거나 눕기도 하신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은 내가 설한 뜻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래는 어디서 오는 것도 아니고
또한 가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여래라 합니다
*******************
여래라는 말은 부처님이라는 말이며
풀이하여 <진여로서 오다>라는 뜻이 있으므로
온다라는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오면서 오지 않고 가면서 가지 않음을 나타 내시려
이 단원의 가르침이 베풀어 집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부처님이
삼천여년 전에 카필라 국의 정반왕궁에
싯달타라는 이름으로 출생하셨다 알고 있습니다
하여 사월 초파일을 부처님 오신날이라 명명하고
관등 법회와 더불어 인류의 큰 스승이 이 세상에 오심을
찬탄하고 그와 닮아 가기를 서원 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 단원에서는
부처님이 도솔천에서 룸비니 동산으로 내려 오셨다거나
팔십의 생애를 사시고 사라쌍수 나무 아래서
열반에 드셨다거나 하는 말로 부처에 대해 이야기 함은
바른 것이 아니라 하시는군요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아마 부처님이 가신지 삼천여년이 지나서
이미 석가모니 부처의 운은 다하고
다음 미륵 부처의 시대가 왔다 하면서
어둑한 중생을 협박하듯 하는 오늘의 세태나
아니면
보라
불생불멸을 말하고
열반을 성취 하였다 하던 부처님이
저렇게 소멸되지 않았는가 하는 견해를 내세워
중생들을 어지럽히는 일을 경계하시는 말씀일 것입니다
부처님의 제자분 중에도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자 한 비구가
이제 우리는 자유를 얻었다
부처님으로부터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하는
말씀을 듣지 않게 되었으니... 하는 경우가 있었답니다
하지만 부처님의 육신이 오고 가며
앉고 눕고 하시는 것은
중생을 위한 대 자비심의 발로로서
무연자비의 천백억 화신을 나투는 그림자와 같고
법신 그 자체에는 오고 감이나 생멸거래가 없음을
강조하시는 가르침인가 합니다
참선을 하는 수좌들에게는
도솔천을 떠나지 않으시고 이미 왕궁에 드시고
마야 부인의 태에서 나오기 전에
중생 제도를 마치셨다 라는 화두가 있습니다
(“세존(世尊)이
미리도솔(未離兜率)에
이강왕궁(已降王宮)이요,
미출모태(未出母胎)에
도인이필(度人已畢)이라.”)
그처럼 승강 거래 출태 입태가
부처님에게 있어 바른 표현이 될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법화경 여래 수량품 같은 곳에는
당신의 성불이 무량겁 이전에 이루어 졌다고도 하시는
부처님 말씀을 상기하면 부처님이 출생과 열반은
중생을 향한 비원의 표현이라 여겨야 할것입니다
깊은 이치를 담고 있는 화두일테지만
쉽게 우리 삶 속에서 비슷한 경우를 찾아 본다면
우리는 휴대폰으로도 나는 여기서 움직이지 않고
내 영상을 친구에게 보내거나
나는 여기서 리모콘 하나로
아테네의 여신들이 혼신을 다해 뛰는 모습을
낱낱이 보기도 하니 가히 윗글이 이야기하는
신통이 뛰어난 존재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다만 우리는 기기의 힘을 빌었다는 차이일뿐.
다시 이런 게송이 있어 소개해 봅니다
일념보관무량겁
무거무래역무주
여시요지삼세사
초제방편성십력
한생각을 모아 두루 무량겁을 살피니
거래도 없고 역시 머무름도 없어라
이와 같이 삼세의 일을 살펴 깨달으면
모든 방편을 뛰어 넘어 부처의 십력을 이루리
라는 의미입니다
부처님은 범부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위대한 지혜와 덕을 갖추고 있습니다.
아라한이나 벽지불 또는 보살과도 구별되는
부처님 독자의 법이라는 뜻으로 십력(十力),
사무소외(四無所畏), 삼념주(三念住),
대비(大悲) 의 18가지를 말합니다.
그 가운데 십력(十力)은
부처님이 중생심의 갖가지 번뇌, 성향, 수행 등에 대해
정확하게 아는 지혜의 힘을 갖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1. 바른 도리와 그렇지 않은 도리를 판별하는 지혜의 힘
2. 선악업과 그 과보를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
3. 4선, 8해탈, 3삼매 등을 여실히 하는 지혜의 힘.
4. 중생의 근기의 높고 낮음을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
5. 중생의 여러 가지 의욕과 경향을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
6. 중생계와 그 성류(性類)를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
7. 어떤 수행에 의해 어떤 도에 나가는가를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
8. 중생의 숙명을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
9. 중생의 미래를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
10. 일체의 번뇌가 다한 것을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
이처럼 무량한 시간이 모여 이룬
과거 현재 미래제의 삼세가
가거나 오거나 머무름도 아니라는 깨달음으로
부처님만이 소유하는 열가지 힘을 성취한다 하니
공부인은 잘 살펴야 하겠습니다
지금 여기 이렇게 존재하는 우리들
역력히 마주 보며 마음 챙김의 공부하는 이순간은
어디서 오거나 어디로 가거나 머무름도 없는
진여로서 존재하는 부처의 마음과 부처의 말과
부처의 행이 되는 시간이요 주인입니다
그러면 앞에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이라 하신 부처님의 가르침이
더욱 분명히 드러 날 것입니다
여시요지삼세사 하십시다
30. 一合理相分 第三十
須菩提 若善男子善女人 以三千大千世界 碎爲微塵 於意云何 是微塵衆 寧爲多不
수보리 약선남자선녀인 이삼천대천세계 쇄위미진 어의운하 시미진중 영위다부
須菩提言 甚多 世尊 何以故 若是微塵衆 實有者 佛卽不說是微塵衆 所以者何
수보리언 심다 세존 하이고 약시미진중 실유자 불즉불설시미진중 소이자하
佛說微塵衆 卽非微塵衆 是名微塵衆 世尊 如來所說三千大千世界 卽非世界
불설미진중 즉비미진중 시명미진중 세존 여래소설삼천대천세계 즉비세계
是名世界 何以故 若世界 實有者 卽是一合相 如來說一合相 卽非一合相 是名一合相
시명세계 하이고 약세계 실유자 즉시일합상 여래설일합상 즉비일합상 시명일합상
須菩提 一合相者 卽是不可說 但凡夫之人 貪着其事
수보리 일합상자 즉시불가설 단범부지인 탐착기사
30. 한 덩어리 이치의 모양
부처님이 말씀 하셨어요
수보리여,
만일 선남자 선녀인이
삼천 대천세계를 부수어 티끌을 만든다면,
그대 생각에 이 티끌이 많다 하겠습니까?
수보리 스님이 답해 올리기를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 티끌들이 실제 있다면
부처님이 곧 이 티끌들이라 설하지 않으실 것입니다만,
부처님이 설하신 미진중은 그 이름이 미진중일뿐
곧 미진중이 아닌 까닭입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신 삼천대천 세계도
그 이름이 삼천대천 세계이지
곧 세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만일 세계가 진짜 있다면
이는 곧 일합상(하나로 합한 모습)이라 하겠지만,
여래가 설하신 일합상은
그 이름이 일합상일뿐
곧 일합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이렇게 말하셨어요
수보리여
일합상은 가히 설할 수 없거늘
범부가 그 일에 집착합니다
**************
지금 이 단원은 우리가 사용하는 말과 글이
표현할수 있는 한계 속에서
부처님과 수보리 스님간의 대화를 통해
삼천대천 세계라는 무한대의 세계가
한 티끌들의 집합체이며
티끌들은 다시 세계의 분화된 모습이어서
어디 하나 일합상이라 할만한 무엇이 없다 하십니다
올림픽이 마쳐 졌지만 꽃이라 할수 있는 마라톤에서
이봉주 선수가 애쓴 만큼의 성적은 거두지 못하였다지요
그 42.195 키로 미터의 마라톤 코스는
어떻게 이루어 지던가요
키로미터라는 단위와
미터라는 단위
센티미터라는 단위
미리미터라는 단위등
우리 인간의 편의를 위해 정한 도량형에서
더 나누어 나노미터(나노미터란
10억분의 1m로 머리카락의 1000분의 1 크기)까지로
다시 세분한다면 천문학적인 숫자의 응집체가 됩니다
그런 천문학적인 숫자의 응집체라도
응집체를 이루는 숫자 하나 하나는 그저 숫자일뿐
숫자가 아닙니다
또 마라토너의 발자욱으로 따져 보더라도
70 센티미터의 보폭으로도
수십만 걸음이 합하여 한 코스가 된다 할때
한 보폭을 떼지 아니하고는
완주란 있을수 없음을 살필수 있습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라고 하셨지요
달리 말하면 천리길도 한 마음으로부터 라는것이
옳겠군요
법화경에서 살펴 보는
일념삼천의 개념이나
법성게에서 말해 지는
일미진중함시방
일체진중역여시등의 게송등이
그를 대변한다 할것입니다
다시 이 티끌들도
극미의 세계로 들어 가서 보면
분자와 원자 소립자간의 거리 하나가
지구에서 달보다 더 먼 거리일수 있음을
현대 물리학은 증명하며
그 티끌 하나 하나를 다시 분석하여 가면
결국은 모든 것이 텅 비어 버린
<<공성의 나툼>>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니
부처님은 일합상이란 가히 말로 설할수 없는 것인데
중생들은 자꾸 어느 것 하나면 하나에
집착을 한다 하십니다
우리가 나 혹은 우리 아니면
내것 우리 것이라는 소유에 사로 잡히면
마음은 바로 자유를 잃고 얽매여 버립니다
하지만 일체의 모든 것에 있어서 걸림이 없으면
대 자유와 대 평화의 출생사의 길이 열리고
탕탕무애하고 외외무비한 삼천대천 세계가
한마음의 현현이 됩니다
하여 다시 보면
부처도 중생도 불가지 불가사의 한 그 무엇인데
우리는 표현의 한계가 있는 우리 말로
부처를 논하고 중생을 말하니
마치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입니다
불이법문에 드는 길에 있어서
성문과 보살들이 수없는 말을 하여서도
유마 거사의 일묵一默 앞에서는 당할 장사가 없었으니
무설설 불문문입니다
31. 知見不生分 第三十一
須菩提 若人 言 佛說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 須菩提 於意云何 是人 解我所說義不
수보리 약인 언 불설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 수보리 어의운하 시인 해아소설의부
不也 世尊 是人 不解如來所說義 何以故 世尊 說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
불야 세존 시인 불해여래소설의 하이고 세존 설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
卽非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 是名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
즉비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 시명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
須菩提 發阿뇩多羅三먁三菩提心者 於一切法 應如是知 如是見 如是信解 不生法相
수보리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 어일체법 응여시지 여시견 여시신해 불생법상
須菩提 所言法相者 如來說卽非法相 是名法相
수보리 소언법상자 여래설즉비법상 시명법상
31. 아는 소견을 내지 않음
부처님은 수보리 스님에게 말하셨어요
만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부처님이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을 설하셨다 하면,
수보리여 그대 생각에는 어떠한가요
이 사람이 내가 설한 뜻을 제대로 알아 들은 사람일까요
수보리 스님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이 사람은 여래가 설하신 뜻을 바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왜냐 하면 세존이 설하신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은
그 이름이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일뿐
곧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 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수보리 스님의 대답을 들으시고는
이렇게 말하셨어요
아녹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킨 수행자는
일체 법에 대하여 응당
이같이 알며,
이같이 보며,
이같이 믿고
이같이 깨달아서
법에 대한 상을 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법상이라는 것도
그 이름이 법상일 뿐
여래가 설한 법상이 아닙니다
****************
우리는 지금까지 부처님과 수보리 스님의 대화를 통하여
위 없는 깨달음의 마음을 일으킨 사람들은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무여열반의 경지에 남김 없이 들어 가게 하라는 것이
불자들을 향한 부처님의 간곡한 부촉임을 살펴 보았고
나아가서 그같은 대승의 보살도를 실천함에는
나라는 생각이나 너라는 상대 중생의 마음
수명이나 목숨이라는 마음등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가져서는 안되고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견고한 생각이
온전히 녹아 없어져서
중생도 부처도 없고
법도 비법도 없고
없음 조차도 없어서
일체의 상을 두어서는 안된다고 이해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 이 단원에서 부처님은 다시 한번
당신의 가르침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수보리 스님에게 묻고 대답을 들으십니다
수보리여 만약 어떤 사람이
부처님이
아상과 아견
인상과 인견
중생상과 중생견
수자상과 수자견을 설하심은
그런 네가지 상과 견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는데
그대 생각에 이 사람이 내 뜻을
바로 이해하였다 생각하는가 하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러자 수보리 스님은
그런 사람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로 이해 하지 못한 사람이며
부처님이 설하셨던 아상이나 인상등은
가르침을 설하시자니 그렇게 말하신 것이지
실제가 아닙니다 하고 답하시는군요
부처님은 이제 당신의 뜻이 분명하게
수보리 스님과
대중 스님들에게 전달이 되었다고 보셨는지
이렇게 말하시는군요
위 없는 깨달음 즉 아녹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자
마음을 일으킨 수행자들은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고
이와 같이 믿고
이와 같이 깨달으라
그리하여 일체 모든 법에 있어서
법상이라는 것을 일으키지 말라 하십니다
그러니 법상도 일으키지 말라는 부처님 말씀을 바로 보면
비법에 대한 상은 더군다나 마찬가지 의미일것입니다
법이냐 법 아니냐 하는
옳고 그름을 논하는 시비 분별에 사로 잡히면
대체로 아시타비 즉 나는 옳고 타의 견해는 그르다라는
중생심에 빠져 자칫 그 생각이 세세 생생 두고 갈수 있음이
수자상입니다
요새 말로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그렇게 싸워 온 역사가 인류의 시원과 맞물려 있다면
오직 부처님만이 그 오랜 중생의 병통을 치유할
방책과 비법을 제시하시는 바
그것이 바로 벽력 같은 지혜로
순식간에 중생의 무명을 타파하고
깨달음의 저 언덕에 이르게 하는 경전이라 이름 된
금경반야바라밀경입니다
위에서 이와 같이라는 말로
알고 보고 믿고 깨달으라 한 부분은
우리 불교가 공부의 과정에서 말하는
교리행과와 신해행증을 연관지어 살펴 볼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교라하고
가르침의 내용을 리라 하며
실천적인 육도만행을 행이라 하고
필경에 얻게 되는 불과를 네가지 법보라 함에
교에는 믿음이요
리에는 앎이며
행에는 실천적인 견해요
과에는 증득의 깨달음이 있을 것인즉
부처님의 가르침이 초기 경전에서 대승 경전에 이르도록
한결같은 가르침의 흐름에 있음을 살펴 보게 됩니다
법상도 자칫 법상이라 하면 이미 비법상이 되기에
법상을 설하시는 부처님도 법상이 아님을 누누이
설하고 계심을 우리는 봅니다
달을 보라 가리키면
달을 보고는 손가락을 잊을 일이요
고기를 잡는 어구는
고기를 잡으면 어구를 잊을 일이고
시험을 보려 펜을 들으면
시험을 마치면 펜을 놓을 일인데
고맙다고 짊어 지고 들고 다니면
외려 그것이 짐이 되니
법상도 역시나 그러 하여
거기에 사로 잡히면 다시 법에 얽매이게 되니(법박)
부처님의 노바심절한 마음을 읽게 됩니다
금강경의 좋은 가르침에 빠져
천일몽을 꾸는 우리 벗님들
꿈 깨시라고 이르시는 우리 부처님의 마음을
여실히 믿고 여실히 보고
여실히 생활과 현장에서 실천하며
필경에는 얻을 바 없는 깨달음 같이 이뤄 가소서
32. 應化非眞分 第三十二
須菩提若有人以滿無量阿僧祗世界七寶持用布施若有善男子善女人
수보리약유인이만무량아승지세계칠보지용보시약유선남자선녀인
發菩薩心者持於此經乃至四句偈等受持讀誦爲人演說其福勝彼
발보살심자지어차경내지사구게등수지독송위인연설기복승피
云何爲人演說不取於相如如不動何以故
운하위인연설불취어상여여부동하이고
一切有爲法 일체유위법
如夢幻泡影 여몽환포영
如露亦如電 여로역여전
應作如是觀 응작여시관
佛說是經已長老須菩提及諸比丘比丘尼優婆塞優婆尼
불설시경이장로수보리급제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
一切世間天人阿修羅聞佛所說皆大歡喜信受奉行
일체세간천인아수라문불소설개대환희신수봉행
32. 응신, 화신은 참이 아님
부처님은 말씀 하셨어요
수보리여
만일 무량 아승지 세계에 칠보를 가득 채워 보시하더라도
어떤 선남자 선녀인이
보살의 마음을 내어 이 경을 지니면서,
내지 사구게만이라도 받아 가지고 독송하며
남을 위하여 설해 주면 그 복이 저보다 뛰어납니다.
그렇다면 남을 위해 가르쳐 주는데
어떻게 가르쳐 줄것인가 말하겠습니다
""설한다는 상을 취하지 않고
여여해서 움직이지 않아야 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꿈과 같고
허깨비 같으며
물거품이며
그림자 같고,
이슬과 같으며
번개와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관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이 경 설하시기를 마치시니
장로 수보리와 모든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그리고 일체 세간의 하늘과 사람과 아수라가
부처님의 설하신 바를 듣고
크게 환희하며 믿고 받들어 실천하였다고
아난 존자가 말씀 하는 것으로 이 경이 마쳐 집니다.
********************
부처님은 이 경이 지니는 가치와 의미가
얼마나 심중하고 큰 것인지 다시 한번 비유로 말하십니다
만약 사람이 있어서 한 없는 세계를 칠보로 가득 채워
보시를 하여서 얻게 되는 복과
이 경이나 경문의 네구절의 게송을
지니고 독송하고 남을 위해 설해 주어서 얻게 되는 복을
서로 비교 한다면
경을 수지독송하고 일러 주어서 얻는 복이
더 크다고 말하시는군요
앞에서도 누누이 부처님이 설하신 이야기로
칠보로 짓는 복은 언젠가 다함이 있으나
경을 일러 주어서 무상의 복전을 성취하게 하는 복은
다함이 없는 복이 되어서 그리 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타인을 위해 이 경이나
사구게를 들려 주는 이의 마음 가짐은
내가 설한다든지 상대가 듣는다든지 하는 등의
마음의 상을 없이 하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진리에 부합하여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하십니다
왜냐하면
일체의 유위법 즉 함이 있는 법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꿈 속의 일과 같아 있는듯 없는 것이며
환영과 같아서 실체가 없으며
물의 거품과 같아서 쉬 꺼져 버리는 것이고
그림자와 같아서 잡을수 없으며
아침 이슬과 같아 해가 나면 없어 져 버리고
허공의 번갯불과 같아 순간에 사라 지나니
마땅히 이와 같이 관함이 옳다 하십니다
꿈 속에서 만리장성을 쌓으면서
갖은 희노애락을 겪으면서 살다가
꿈을 깨고 보니 향 한자루가 다 타기 전이었다는
조신 대사의 이야기나
나비가 되어 살다가 돌아 온 장주의 이야기등을
예로 들지 아니 하여도
지금 우리네 삶을 돌아 보면
마치 꿈 속과도 같고
허망하기가 이를데 없어서
무상의 신속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합니다
마치 정지 기능이 없는 기차를 타고
삶과 죽음이라는 두 레일 위를 달리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삶과 죽음을 둘다 내려 놓기 전에는
쉴 사이 없이 돌고 돌며 정류장에서 정류장으로
흐름을 멈출수 없음이
부처님이 설하시는 육도에 윤회하는
삶과 다름 아닙니다
그 속에서 희노애락 애오욕의 칠정과
사대가 서로 조건이 맞지 않아서 삐그덕 대면서
생노병사의 고해를 떠도는 미아의 길을 쉬도록
단번에 벽력같은 가르침의 지혜로
단칼에 끊어 내는 가르침과 힘이
이 금강경에 있습니다
응작여시관이 그 가르침이며
불취어상 여여부동하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사실 번갯불은 밝은 대낮에는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것이지만
어두운 밤에는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것처럼
우리 부처님의 가르침은
청정한 진여의 세계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에
법을 설하되 한 법도 설하지 않았다 하시나
우리네 어둑한 중생의 꼭둑각시의 놀음에는
순간의 빛을 통하여 우리 자신이 무엇인가 확인하게 하는
고귀하고 진실하여 이생을 비껴서는
다시 만나기 어려운 무상 법문입니다
이렇게 부처님이 말씀하시자
같이 자리 하셨던 천이백 오십인의 성스러운 대중들과
재가 불자들 그리고 하늘 사람과 아수라등이
크게 기뻐하고 믿어 지니며 받들어 실천하였노라고
아난 존자는 기억을 떠 올려 말하시고는
금강경이 마쳐 집니다
이제 금강경을 통해서 일어 난
한바탕 꿈속 여행은 마쳐 지고
연극은 각본대로 진행 되었으며
장문의 소설은 끝이 났습니다
연극을 다 보면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 나듯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 가되
마음 속에는 일체 중생을 무여 열반으로 들게 하라는
부처님의 부촉과
육도만행의 실천적 의지는 가지고 가십시요
머무는 곳마다 이르는 곳마다
일체시 일체처에 부처님의 금강경 행자가 되시어
인천의 청하지 않은 벗 되셔서
부주생사 부주열반하는 삶 살아 가시옵소서
간경 결제를 회향하며
사바세계 남섬부주의 인도 대륙에 위치한 사위국.
대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기타 태자와 급고독 장자가
뜻을 모아 지어 드린 청정한 기수급 고독원에서
사시(지금의 열시 전후) 공양 시간이 되자
부처님과 성스러운 대중 스님들 천이백 오십인이
바릿대를 드시고 탁발을 나서십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일까요
하루에 한끼를 드시되
다만 몸의 기운을 다스리는 약간의 음식을 얻어
정진의 자량으로 삼으시고자
맑은 눈빛과 바른 몸가짐으로 안행을 지어
성곽으로 들어 서는 모습들
삼계의 스승이시고 사생의 어버이시며
우리들의 본사이신 부처님도 같이 하신 행렬
성내의 백성들은 각자 마련한 음식을 정성껏 준비하여
스님네들이 자신의 집앞을 지나기를 기다려
알맞게 공양 올리는 모습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차례로 일곱집을 돌아 빈부 귀천 가림 없이
공양에 대한 복전 됨에 소홀하지 않도록 마음 챙기며
기원 정사로 한걸음 한걸음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돌아 와서
사중은을 생각하며 천천히 공양 하시는 모습들
깨끗하게 남김 없이 드신 연후에 가사와 발우를 거두시고
흙이 묻은 발을 씻으신 후에 조용히 가부좌 하고 앉아
마음과 몸과 호흡을 전일하게 하여 앉으시니
마치 한사람이 조용히 움직이는 듯
천이백 오십인의 일거수 일투족이
참으로 아름답고 성스럽습니다
다만 이 일이 전부입니다
다만 탁발하시고 돌아 와서 공양 드시고 앉으신 일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대중 가운데 덕이 높고
해공 제일이라 불리우는 부처님의 사랑스런 제자
수보리 존자가 조용히 일어 나서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는
최상의 공경을 담아 이렇게 말 합니다
희유합니다 세존이시여
희유합니다 세존이시여
도대체 수보리 존자는 무엇을 보고 희유하다 하며
부처님과 대중들 속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필경에 아무런 말 없이 행해 지는 동작 가운데
수보리 존자는
무언가 이 금강 반야경의 단초가 될만한
그 무엇을 보았음입니다
저는 오히려 수보리 존자의 그런 마음과 행동이
참으로 희유하고 희유할 따름입니다
이제 그 무엇에서부터 시작하여
참으로 희유하고 다시 만나기 어려운 법문이
법계의 대해를 가득 채우면서 신수봉행을 끝으로 마쳐 지니
부족한 지견과 짧은 문장으로 논설을 해오던 날들도
여름의 무더위를 지나 청량한 계절에 이르러
아름다운 회향을 하게 되었습니다
부처님과 수보리 존자의 뜻에
백천만억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는 내용인줄 알면서
위로는 사중은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중생의 시주 은혜를 생각하면서
쓰고 짓고 보내 드린 시간은 참으로 행복하였습니다
어느 산에 대웅봉 아래에 살던 스님에게
누가 이 세상에 제일 희유하고 기특한 것이 무엇인가요
물으니
스님은 독좌대웅봉
홀로 대웅의 봉우리에 앉음이라 대답하셨다 하던데
우리는 오늘 홀로 대웅(세존)의 가르침의 봉우리인
금강반야바라밀경을 같이 연독하는 인연을 가지니
이 또한 참으로 희유하고 희유한 일이라 할것입니다
부처님에게는 당신의 마음을 알고
하나 하나 질문하는 수보리가 있었기에
금강 반야의 꽃잎이 하나씩 펼쳐 졌던 것처럼
이 금강경 결제는
우리 도반들의 기다림과 관심이 있어서
오늘의 거룩한 회향에 이른 것이라 생각하니
이는 오직 부처님의 가피요
우리 불자들의 깊고 깊은 마음의 성원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던 것 같습니다
이제 동서남북 사해와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심을 결단하고
처해 있는 자리에서 독좌대웅봉의 마음으로
삶을 결제하고
아녹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 일으키어
일체 중생을 향한 무량한 자비의 법선 띄우고
금강 반야를 나침반 삼아 힘차게 노를 저읍시다
다시 한번 무장애하게 간경 회향을 하게 됨을 감사드리며
불청지우의 변을 대신 합니다
그저 이러하고 이러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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