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심과 괴로움으로 힘겨울 때...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으면 업신여기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생기나니,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행복과 즐거움으로써만 세상을 살아가려 합니다.
오직 그것만을 위해 앞만 보고 살아갑니다.
근심과 곤란이 내 앞에 놓이게 되었을 때
우리는 금새 괴로워하며 좌절하고 맙니다.
왜 이런 괴로움이 내게만 오는 것일까 하며
인생을 탓하고 세상을 탓하고 운명을 탓하기 일수입니다.
행복과 즐거움은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며
근심과 곤란은 우리가 버리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 크게 세상을 바라봅시다.
오히려 근심과 곤란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큰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봅시다.
우리 앞에 다가오는 크고 작은 이 모든 경계는
즐거운 것이든 괴로운 것이든
결국에는 그 모두가 바로 ''나 자신''인 것입니다.
내 안에서 모든 것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결코 내 앞에 다가오는 경계를 둘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에 다가오는 근심과 곤란에 쩔쩔매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있기에 온갖 경계가 있는 것이며
나아가 세계가 있고 우주가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한다면
지난 과거에 몸으로 지은 행동 하나 하나
입으로 내뱉은 말 한 마디 한 마디 그리고 뜻으로 지은 생각 하나 하나가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 되어 하나도 남김없이 저장되어 있다가
현실이라는 경계 속에서 하나씩 풀려 나오는 것입니다.
즐겁고 괴로운 이 모든 경계는
지은이가 나이기에 그것을 풀어 나갈 사람도 오직 ''나'' 하나 뿐입니다.
근심과 곤란에 부딪혔을 때
''왜 이런 어려운 일이 하필 나에게 일어날까''
하며 답답해하는 이도 있지만
''나를 이끌어 줄 새로운 수행의 재료가 왔구나'' 하고
당당하게 맞서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 생각 어떻게 돌리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과 내 앞의 미래가 좌우될 것입니다.
수행자와 중생의 차이는 이 한 생각의 차이에 있습니다.
똑같은 경계를 밝게 돌려 나갈 것인가, 어둡게 만들고 말 것인가!
이 한생각의 차이가 이 세상을 천상으로 또 지옥으로 만들 것입니다.
근심과 곤란 없이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온 생은 전생 그 전생
억겁을 이어온 삶의 자취 속에서
수없이 많은 악업과 선업을 지어 왔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은
그 악업과 선업을 과보가 되어 하나씩 풀려 나오는 곳입니다.
수없이 많은 선업과 악업을 지었기에
끊임없는 즐거움과 괴로움의 과보가 내 앞에 펼쳐져 있는 것입니다.
오직 즐거움만을 추구하며 산다는 것은
내가 지은 악업은 지워버리고
선업만을 짊어지고 살아가려는 욕심에 불과합니다.
지은 것(원인)은 반드시 그에 합당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인데도 말입니다.
근심과 곤란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근심과 곤란이 없이 모든 일이 잘 되어 간다면
나에 대한 자만심과 상대에 대한 업신여기는 마음이 커지고
경계에 닥쳐 사치한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로 인해 몇 배 더 큰 근심과 곤란이 또아리를 틀고
내 안에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근심과 곤란 없이 모든 일이 순조로워
부와 명예와 권력 등을 쉽게쉽게 얻게 되면,
나 잘났다는 아상이 커지며 또한 상대방을 낮춰 보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커지고,
동시에 사치한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고 그에 대한 댓가를 받아 써 본 사람은
쉽게 사치스러울 수 없지만,
부모님의 돈이라든가, 한바탕 대박으로 번 돈에 대해서는
살뜰한 마음없이 쉽게 쉽게 사치를 저지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리고는 교만과 사치가 늘다보니 아만심과 자기자랑을 늘어놓기 바쁩니다.
실제로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은근히 모든 말에 자기자랑과 자만을 늘어놓는 사람 말입니다.
자기자랑을 많이 하면 자기가 높아질 것 같고 대단해 질 것 같지만
실은 한없이 초라해지며 상대방에게서 고립되고 소외되기 쉽습니다.
오히려 상대방을 높이고 칭찬하며 찬탄하는 가운데
진정 나의 가치는 한없이 높아지는 법입니다.
‘나 못난’ 줄 알고 살아야 합니다.
내가 잘났다는 아상이야말로 가장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상대방을 높이고 나를 낮추게 되면
모든 이들이 그를 따르고 좋아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상이 없어, ‘나’라는 울타리를 깨고 사니
너도 나도 그 어떤 사람이라도 나와 하나 될 수 있는 연유입니다.
‘나’라는 울타리는 나와 상대를 구분 짓는 선이기에
나를 깨고 살아야 모두가 어우러져 하나 될 수 있는 노릇입니다.
그러니 세상살이 순탄하기만을 바라서는 안 될 일입니다.
반드시 근심과 곤란이 있어야
때로는 고개 숙여 하심 할 줄도 알고 상대방 높여 줄줄도 알며,
내가 그랬듯 힘겨운 이를 돌아볼 수 있는 마음도 생기고,
힘든 때를 거울삼아 더욱 치열하게 정진할 줄도 알게 됩니다.
이렇듯 교만심과 사치하는 마음을 버리고 하심하게 되면,
저절로 근심과 곤란의 경계들이 줄어들게 됩니다.
무릇 경계는 순역이 따로 없어
마음 짓는대로 같은 경계가 순도 되고 역도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심하여 일체 모든 경계를 다 받아들이고자 마음 낸 수행자에게
어찌 근심 곤란이라는 분별이 따라붙을 수 있겠습니까.
마음만 내려놓으면(下心)
일체 모든 경계가 그대로 부처님의 경계가 됩니다.
근심과 곤란이라는 경계 또한 그대로 부처님의 경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근심과 곤란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밝게 이끌어 주는 참된 부처님이십니다.
진흙 속에 피어나는 연꽃처럼
근심과 곤란 속에서 밝게 피어나는 수행자가 되어야 합니다.
앞으로도 끊임없이 다가올 내 앞의 근심 걱정, 괴로움을
그저 힘없이 받아들이며 괴로워하며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경계에서도 당당하며 떳떳하게
그리고 걸림 없이 여여(如如)하게 대처할 수 있는 것이
수행자의 마음입니다.
우리네 어리석은 중생은 선업의 즐거운 과보가 오면 좋아하고
악업의 괴로운 과보가 오면 슬퍼하며 안절부절하게 되지만
당당한 수행자는
즐거운 과보가 오더라도 담담하게 맞을 수 있고
괴로운 과보가 닥치더라도 ''허허'' 하고 웃어넘길 수 있는
넉넉한 여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실로 수행자의 가치는 근심과 곤란이라는 경계에 닥쳤을 때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는 법입니다.
본래 우리의 마음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가을 하늘과 같기에
어떤 경계에도 집착하고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내게 다가오는 근심과 곤란은 그 성품 자체가 공(空)하여
다만 인연 따라 잠시 일어나는 물거품과도 같은 것입니다.
경계 자체가 꿈같아 허망할진데
어찌 꿈에 놀아난다면 수행자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근심과 곤란을 마음속에서 거부하지 말고
당당히 받아들이며 걸림 없이 그 경계에 놀아나지 않음이
수행자의 묵연한 자세인 것입니다.
다가오는 모든 경계가 바로 ''나''의 다른 모습임을 굳게 믿고
내 안에 ''참 나 주인공''
그 맑고 향기로운 뿌리에 모든 것을 놓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방하착(放下着)!!
이는 모든 불교 수행의 핵심입니다.
근심과 곤란 그 자체를 놓아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붙잡고 있으면 얽매이게 됩니다.
근심도 놓아버리고 걱정도 놓아버리고
오직 마음은 평안에 머물면 됩니다.
진정 모든 것을 놓았을 때
이전에 지어 온 모든 업장은 자연스레 녹게 됩니다.
세상 모든 문제에 닥쳐 밖을 탓하지 말고
오직 나의 문제로 돌릴 줄 알아야 합니다.
내 문제로 돌리고 내 안에서 해결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내 안에 ''참 나''의 부처님 마음자리에 모든 것을 놓고 나면
이미 경계는 사라집니다.
문제가 그 자리에서 나왔으니 해답도 그 자리에서 나오는 이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놓아야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방하착(放下着)..
''놓음''의 방편 수행으로 우리는 ''염불''을 합니다.
방하착 염불수행,
이것이 바로 염불로써 올리는 참된 마음공양인 것입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어떤 상황에서든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염불하는
그 마음 가운데 ''놓음''이 있습니다.
집착을 놓기 위해 염불하는 것입니다.
지극한 염불은 모든 경계를 녹여 버립니다.
근심과 걱정거리란 경계가 닦치는 순간,
근심 걱정되는 마음이 올라오는 순간
그 안팎의 모든 경계에 대고 지극한 마음으로 염불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은 내 밖에 있지 않습니다.
내 안에 살아 생동하는 ''관세음보살''이 되어야 합니다.
''나무아미타불''도 좋고 그저 ''방하착'' 해도 좋습니다.
아니면 ''참 마음'' ''주인공'' ''불성''
이름이야 어떻든 그 근본이 내 안으로 향하면 될 것입니다.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는 법문은
근심과 곤란을 내 밖으로 밀쳐내려 하지 말고,
벗어나려 발버둥치지 말고,
내 안에서 다 받아들여 다 녹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일체를 자성부처님 자리, 본래 나온 자리에
턱 놓아버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무 아미타불
본사(本師)합장
병(病)으로 괴로워 할 때...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부처님께 서 말씀하시되
'병고로써 양약 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부처님께서는 병을 괴로움으로 보셨습니다.
'병고(病苦)'라고 하여
4가지 커다란 괴로 움인 나고(生) 늙고(老) 병들고(病) 죽는(死)
생노병사 가운데 하 나의 괴로움으로 이야기 하셨습니다.
그만큼 우리 중생들 에게 병이란 '괴로움'의 존재인 것입니다.
괴로움이란 인과(因果)라는 가르침 가운데
악인악과(惡因惡果) 의 범주에 속한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악한 원인을 지으면 악한 과보를 받는
그 가운데 하나의 악과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즉 병이란 내가 지 은 악한 과거세의 원인에 대한
괴로운 과보의 하나 라는 것입니다.
나와 나 이외의 것 을 둘로 보고 성내고 헐띁고 싸우던 진심이
악의 업보가 되어 병고라는 과보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또한 마음을 닦지 않아 정신적인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살았거 나,
무언가에 풀지 않은 깊은 원한심을 안고 살았거나,
누군가를 지독히 미워하고 증오했거나,
살생의 업을 짓고, 영가의 장애로 말미암는 등
다양한 종류의 원인을 스스로 지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결과인 것입니다.
이렇게 보았을 때 병 또한 결국 내 안에서 나온 것입니다.
원인이 내게 있다면 그 결과 또한 내게 있으며
결과를 바꾸는 힘도 내게 있습니다.
병이란 것은 결코 나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나의 또 다른 모습 인 것입니다.
병의 원인이 내게 있기에
병을 이겨낼 수 있는 힘도 내 안에 다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린 병에 걸리면 우선 병원부터 찾고 약부터 찾기에 바쁩니다.
병의 근본이 무엇인지 살피려 하지 않고
외부의 수단으로 외부에 드러난 병을 치유하려 합니다.
병은 뿌리를 치유해야 합니다.
약으로 병을 다스렸다 하더라도
그것은 겉에 드러난 병의 바이러스를 치유한 것이지
근원에 있는 병의 원인 그 자체를 치유한 것은 아닙니다.
병 또한 나와 둘이 아니라는 그런 절실한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자각이 아니라면 굳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내게서 나왔기에
병을 치유할 수 있는 손길은 오직 내 안에 있음을
굳게 믿을 수 있어 야 합니다.
내 안에 '약사여래'의 손길에 모든 것을 내맡겨야 합니다.
내가 나를 헤칠 수 없듯 병도 나를 헤치지 못합니다.
모든 것을 내 안에 참 나 참 생명
그 밝은 자리에 굳게 믿고 맡겨버린다면 병은 이미 '양약'이 될 것입니다.
본래 ‘나’가 없을 진데(無我)
도대체 병이 붙을 자리가 어디란 말입니까.
지독한 육신의 아상 (我相)에 사로잡혀 ‘나’를 놓지 못하기에
‘병’또한 붙게 되 는 것입니다.
‘나’를 놓아버리면 병도 아픔도 모두 비워지게 마련입니다.
가만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
두 눈을 지긋이 감고 호흡을 깊게 집중해 쉬며 가만히 관찰을 합니다.
처음에는 호흡의 이동을 관찰하고
몸과 마음이 차분해 지면 내 몸의 병이란 놈을 가만히 지켜봅니다.
가만히 지켜봄에 머물면 됩니다.
마음은 절대로 가만히 두시고 오직 믿고 맡기기만 하면 됩니다.
‘지켜봄’ 그 수행,
‘맡김’ 그 굳은 믿음 속에 병고는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입니다.
맡긴다는 것은 병고 또한 내 안에서 나왔으니
내 안의 참나 자성 부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실 것이라고
굳게 믿고 맡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작은 내가 힘들 고 내가 아파하고 내가 이겨내야 한다면
우리 중생들의 마음으로서는
때때로 감당하기 어려울만큼 크게 다가올 수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 다 맡긴다는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이 또한 결국엔 내 스스로 이겨내는 길입니다.
다만 내 안에 참생명 자성부처님께 맡김으로써
고통을 떠맡고 있는 이 작은 나는 병고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됩니다.
자연을 가만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자연은 약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약을 필요로 하고 삽니다.
자연은 그 스스로의 자연치유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무 가지가 부러지면 약을 바르지 않아도 스스로 다시 돋아나며,
산이 잘려 나가 황폐해 져도 스스로 다시금 온갖 식물들을 잉태합니다.
동물들이 피가 나 고 다쳤더라도 저절로 상처는 아물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은 인간 또한 그러한 자연치유력을 가지고 삽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러 한 자신 스스로의 능력을 굳게 믿지 못하기에
나약한 마음으로 바깥의 양약에 의지하며 삽니다.
본래 약이란 것도 다 내 안에 저절로 갖추어져 있는데 말입니다.
예를 들어 어린 아 기들은 잘 다치지 않습니다.
아기를 돌보다가 땅 에 떨어뜨려도 그리 크게 다치지는 않습니다.
또한 차사고가 났을 때라도
잠을 자던 사람은 사고 순간을 목격하고 놀란 사람보다 덜 다칩니다.
이 말은
턱 놓고 사는 사람,
시비 분별을 짓지 않고 맑고 순수하게 사는 사람은
참 나의 본래자리와 좀 더 가깝기에
다치는 일도 더 줄어들 뿐 아니라
사고가 나더라도 적 게 다치고, 상처 또한 더 쉽게 아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고 나는 순간 움 찔 하며 긴장하고 있으면
그만큼 우리 몸이 그 순간 자연과 법계와 하나 되기 어렵습니다.
잠을 자고 있으니 머릿속의 시비분별이 어느 정도 가라앉게 되어
몸 자체가 알아서 대응하고 자연스레 덜 다치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요즘이야 조금만 손가락에 피가 나도
야단을 치며 약을 바르고 병원을 가고 하지만
사실 우리 몸은 손가락이 잘려 나가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제 스스로 아물고 상처자국의 균을 제거할 수 있는 자연치유력이 있습니다.
이런 말은 우리 인 간들 또한
애쓰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다 놓고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기야 무조건 잡고 만 살아서는 살 수가 없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니 병고에 시달리게 되었을 때
우리 수행자는 모름지기 병에 대한 괴로움, 그 마음부터 놓아야 할 것입니다.
병에 대한 집착을 턱 놓고 나면
우리 몸은 그대로 본래의 참나와 하나가 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야만 우리 몸 스스로가 알아서 반응하고
알아서 치유하고 약사여래의 손길을 뻗쳐 주게 될 것입니다.
물론 병원에 가지 말고, 약도 먹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아프니까 약을 먹고 병원을 가야겠다고 마음 내고 나면
약에, 병원에 의지하는 나약한 마음을 키우게 되니
돌이켜 자성부처님께 온전히 놓을 수 없게 될 것이란 말입니다.
아무리 병원에 가 고 약을 먹더라도
그 병의 근본 원인은 내 안에서 치유해야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예를 들어 어떤 이가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병고라던가
고질적인 병고를 들어 전생의 업장 탓만을 하고 산다면 어떻습니까!
사실 업보라고 말은 하지만 무슨 실체가 있어
업보가 붙을 자리 가 있겠습니까.
내 마음 속에 있는 ‘병들었다’는 생각, ‘전생의 업보다’라는 생각
그 생각들을 턱 놓고 털어 버리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병고처럼 훌륭한 수행의 재료가 어디 있습니까.
저 또한 불법을 공부하고부터는
어지간한 병치레가 있더라도 굳게 믿고 맡기며
나의 중심으로 병 고 또한 돌려놓게 되었습니다.
아플 만 하니 아프겠지, 병이 올만 하니 왔구나 하면서
병고를 공부의 재료 로 한번 써 먹어야지 하고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그런다고 한순간 병 이 다 떨어져 나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병의 아픔은 한동 안 우리 몸과 마음을 다치게 할지 모릅니다.
그렇더라도 그 ‘아 픔’이라는 놈까지 온전히 방하착하고,
죽기 살기로 덤벼들 면 어지간해서는 병고도 고개를 숙이고 맙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병고라는 것은 어쩌다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설령 전염병에 재수없게 걸려들었다고 할지라도
그 또한 나의 인연이며, 당연히 내게 왔어야 할 내 수행의 재료입니다.
누구를 탓할 일도 아니며, 약한 나의 몸을 탓할 일도 아닙니다.
당당히 받아들여 어차피 한 번 받았어야 할 병고의 과보를
밝게 녹여내실 수 있는 수행자 되기기 바랍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도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확고한 믿음이 필요 합니다.
죽으면 죽었지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굳은 믿음!
참으로 그런 묵직한 믿음이 있을 때 온전한 방하착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 가는 데로
몸에서 원하는 데 로 먹고 싶은 것들을 맛있게 먹으면 됩니다.
몸에서 원하는 그 어떤 음식도
그때부터는 그저 그 대로 '약'이 됩니다.
약이 따로 있는 것 이 아닙니다.
밥을 먹으면 밥이 약이 되고, 물을 마시면 물이 약이 되는 법입니다.
약을 먹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먹는 바 없이 먹으면 됩니다.
밥 먹고 물마시며 양약으로 삼듯, 약 먹고 양약으로 삼을 수도 있는 노릇입니다.
다만 약에 노예가 되지 말라는 말이지요.
이렇듯 놓고 가면 그 무엇이라도 양약으로 화해지는 법입니다.
까짓 병 쯤이야
내 수행의 작은 재료로 돌려놓을 수 있는
구도자의 여유를 찾으시길 바랍니다.
수행자의 당당한 한 마음 속에 병고란 하찮은 티끌 밖에 되지 못 할 것입니다.
그러나 수행자는 병 이 없기를 바라선 안 될 것입니다.
육신이 있는 존재라 면 생노병사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오히려 병고가 없다 면 그것은 법계의 이치가 아닙니다.
그러니 수행자는 돌이켜 병고로써 양약을 삼을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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